“악보를 외워야 하는 게 정말 힘들던데요.”
“저희 지휘자들은 각 파트의 악보를 거의 외웁니다. 피아노 하나만 하더라도 수 만개의 건반이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어야 하는 거죠.”
“그게 가능한가요?”
“그걸로 먹고 사는 직업이니까 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 음악분야만이 아닙니다. 전문 프로바둑 기사들을 보면 자기와 상대방이 둔 바둑을 나중에 다 복기하잖습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 한 연극인의 서재가 떠올랐다. 대학로에 있는 한 유명연극인의 윤석화씨 사무실 서재에서 희곡집들이 꽂혀 있는 걸 봤다. 무심코 희곡집 하나를 빼서 보았다. 두 세사람이 출연하는 연극에 어마어마한 양의 대사가 담겨있었다. 그걸 다 외워야 하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장면마다 표정과 행동 그리고 어조까지 완벽하게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어야 했다. 내가 아는 한 원로 여배우 금보라씨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많은 대사를 그렇게 빨리 외워요?”
그녀는 고등학교 때 수 만명의 지원자 중에 선발된 배우였다.
“저도 모르겠어요. 먹고 살려고 하니까 그게 머릿속에 들어와요. 그런데 촬영이 끝나면 빠져나가는 것도 빨라요.”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초등학교시절부터 암기하는 기계였다. 입시자체가 암기 테스트였다. 법대에 입학해서 고시공부를 시작할 때였다. 합격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이해하는 것 보다 헌법부터 시작해서 법조문을 달달 외우는 게 필요해 그 다음은 교과서나 판례도 문장까지 그대로 외워야 해. 백지로 나누어주는 고시 답안지에 즉각 답을 적어나가야 하는데 이해한 걸 문장으로 만든다는 건 현실에 맞지 않기 때문이야. 자기 식으로 표현했다가는 낙방이야.”
나는 배우가 대사를 그대로 외우듯 법조문과 판례문장들을 외워 나갔다. 어느 분야나 비슷한 것 같았다. 애플을 창립한 미국인 스티브 잡스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중학교 때부터 전자회로망을 외국어 단어같이 암기하고 다녔다. 성직자들은 경전의 구절구절을 입에서 술술 나올 정도로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컴퓨터의 발달로 그런 암기의 시대가 지나갔다. 법정에 가면 재판장의 입에서 “그런 판례가 있는지 검색해 볼 께요”라는 말이 나온다.
전에는 판례를 많이 암기하고 있는 판사가 실력 있는 법관이었다. 내비게이션에 길 찾기를 맡긴 이후에는 길을 외울 필요가 없어졌다.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어 암기할 필요가 없다. 그게 과연 좋기만 한 것일까. 어느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것 같다. 그렇다고 암기력대신 다른 창조의 능력이 채워졌을까.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역시 암기는 뇌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이 아닐까. 자료가 풍부하게 깊은 속에 입력되어 있어야 결합도 하고 추론도 하면서 창조를 할테니까 말이다. 인간의 삶이란 결국 한 덩어리 기억일 것 같기도 하다. 공부하고 밤하늘의 별을 보고 사랑하고 그런 기억들을 우리는 가지고 가는지도 모른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