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섬을 빠져 나온 흔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섬 주민들 집을 다 뒤졌다. 헬기를 동원해서 인근 바다까지 수색했다. 그의 사라짐은 자살 쪽으로 결론을 짓고 있었다. 아내에게 ‘미안하다’라고 쓴 쪽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실종에서 이 시대 평범한 한 서민 가장의 삶의 한 형태를 본다.
세월 저쪽에 있는 초등학교시절 그와 놀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는 열평 정도의 서민한옥이 어깨를 붙이고 있는 좁은 골목 막다른 집에 살고 있었다.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둠침침한 집이었다. 꼬질꼬질하게 때 묻은 반바지에 볼펜똥을 가득 묻힌 런닝셔츠를 입은 그 아이는 가난하지만 항상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고무줄에 돌돌 접은 종이를 걸어 쏘는 싸움을 하기도 하고 함께 중학교입시준비를 하기도 했었다. 무난하게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대학수학과를 졸업하고 보험회사에 들어가 근무하다가 정년퇴직을 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얼마의 돈이 부부의 남은인생을 지탱할 생명줄이었다. 얼마 살지 모르는 남은 인생은 길고 돈도 일자리도 없는 바닷가에 방치된 폐선 같은 신세가 됐다. 어쩌다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물었다.
“그래도 우리가 어려서는 모두 잘 살았잖아?”
그가 넋두리같이 말했다. 그의 소주잔엔 슬픔이 반쯤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최면을 걸어 억지로라도 위로받고 싶은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판자 집들이 게딱지같이 닥지닥지 붙은 낙산 아래 동네에 살았다. 우리들의 눈에는 루핑을 지붕으로 하고 박스로 지은 판자집보다는 그래도 기와를 덮은 집에서 살았던 게 잘 살았다는 인식의 근거였다.
“너희 집은 대궐 같이 넓은 이층집이었어. 부러웠어.”
그가 내게 말했다. 내가 씩 웃으면서 물었다.
“너 우리 집 아래층이 몇 평인지 아니?”
“마당도 있고 엄청 넓었지.”
“열 평이었어. 그리고 나무와 판자로 엉성하게 만든 왜식가옥이기 때문에 난 항상 썩은 다다미 냄새가 나는 방에서 쥐와 빈대 벼룩하고 친구하면서 자랐어. 겨울이 되면 얇은 유리창 틈으로 칼바람이 들어오고 일본식 창호지 방에서 화로도 없었어. 그게 저택이야? 나는 그래도 흙벽에 온돌구들방을 가진 네 집이 부러웠지.”
그는 어린 시절 우리가 그래도 잘살았다는 데 동의해 달라고 했다. 그와 헤어진 후 뒷맛이 씁쓸했다. 그는 자신의 황혼과 절망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몸부림을 쳤다. 그는 다시 살고 싶었던 것 같다. 형제들의 돈까지 빌려 법원에서 나오는 경매에 넘겨진 부동산에 손을 댔다. 그러다 그 돈을 모두 털렸다. 그는 카드깡까지 해서 돈을 빌려 쓰며 안간힘을 썼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것 같았다. 그는 어느날 아내와 여행을 했던 남해의 호젓한 섬을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장소로 한 것 같다. 그는 평범하게 성실하게 살아온 대한민국 서민의 초상이었다. 그의 사라짐을 애도하면서 하나의 상상이 나래를 폈다. 그가 어느 안개 낀 무인도에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