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게임은 양날의 검이다. 정권 초 으레 등장하는 군기반장을 통한 시스템 구축의 전초작업일 수도 있지만, 정권 균열을 재촉하는 단초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비선은 없다’던 문재인 대통령과는 달리, 미래권력을 향한 이들의 다툼은 서서히 달아오른다. 파워게임을 조율할 컨트롤타워, 이 지점이 9월 정국의 관전 포인트다.
문재인 대통령이 18일 오전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을 마친 뒤 밖으로 나오고 있다. 최준필 기자
8월 정국은 문재인 정부 참모그룹 권력다툼설로 초반부터 들썩거렸다. 물꼬는 경제라인이 텄다. 핵심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인 ‘김동연 패싱(건너뛰기)’ 논란이다. 정부 경제정책 두 축인 증세와 부동산정책 등에서 김동연 부총리 모습은 간데없고 청와대와 실세 장관들만 보였다. 일각에선 노무현 정부 시절 정통 관료인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흔들었던 당시 386(30대·80년대·학번·60년대 생)그룹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세법 개정안 등 증세와 소득주도 성장론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주도했다. 김 부총리는 증세에 대해 “명목세율 인상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국회 인사청문회 이후 네 차례나 부정적 입장을 피력했다. 하지만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총대를 메고 정치인 장관인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이 가세하면서 여당발 증세 논의에 불을 지폈다. 여기에 청와대가 마지막 퍼즐을 맞추면서 법인세·소득세 인상을 골자로 하는 내년도 세법 개정안이 마련됐다. 김 부총리는 7월 28일 세법 개정안 기자간담회에서 “경위야 어쨌든 시장에 혼선을 줘서 유감”이라며 고개를 숙였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예상됐던 일”이라고 말했다. 정권 초반 정책의 양대 산맥은 ‘장하성 라인’과 ‘변양균 라인’이었다. 장 실장 측근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최종구 금융위원장, 최수규 중소벤처기업부 차관 등이 꼽힌다. ‘변양균 라인’은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홍남기 국무조정실장, 청와대 반장식 일자리수석, 이정도 총무비서관 등이다. 이들은 노무현·문재인 정권을 관통하지만, 소득주도 성장론 등을 놓고는 의견을 달리한다. ‘장하성 라인’은 소득주도성장론에 긍정적인 반면, ‘변양균 라인’은 한계론에 방점을 찍는다.
양 축의 갈등설을 일축하는 반론도 있다. 관료 출신인 김 부총리 대신 당·청이 증세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야당 및 반대 여론을 정면 돌파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동연 패싱’은 권력다툼이 아닌 당·정·청 간 조율된 각본일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다만 특정 인사에 대한 패싱이 곳곳에서 포착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다.
애초 부각된 쪽은 ‘변양균 라인’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하루 만인 5월 11일 홍 실장과 이 총무비서관 등을 임명했다. 장 실장 등은 그로부터 10일 뒤인 5월 22일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러나 이후 ‘장하성 라인’이 ‘변양균 라인’과의 이니셔티브 게임에서 판정승을 거뒀다는 게 정치권 안팎의 분석이다. 장 실장이 주도한 소득주도성장론이 ‘문재인 노믹스’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것이나, ‘재계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위 기업집단국이 부활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경제팀 3인방(장하성·김상조·김동연)의 희비가 뚜렷이 갈린 셈이다.
최근 여의도에선 민주당 원내지도부 등 당내 일부 인사가 청와대에 대통령 직속 위원회 구성 등을 건의하러 갔지만 번번이 막혔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 중심에 장 실장이 있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실세는 따로 있더라”며 푸념했다. 민주당이 기재부 등 정부 부처보다는 강하지만, 일부 정책에서는 ‘당 패싱’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특히 당 내부에선 여·야·정 협의체 구성이 지지부진한 것과 맞물려 불만이 속출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정의당 포함을 둘러싼 민주당과 보수야당의 갈등 탓에 지지부진하지만, 속내는 미묘한 당·청 관계와 무관치 않다는 얘기가 들린다. 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여·야·정 협의체 구성의 당위성을 촉구한 이후 구체적 논의는커녕, 추 대표의 ‘머리 자르기’ 발언 등 당·청 갈등이 계속됐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여·야·정 협의체의 키는 청와대가 쥐고 있다”고 말했다. 당 관계자들의 불만은 적지 않지만, 문 대통령의 지지도 고공행진으로 냉가슴만 앓고 있다. 문재인 정부 100일간 중간평가는 ‘청와대 장하성 라인>민주당>변양균 라인’인 셈이다.
‘장하성 라인’이 뜨자 청와대 정책라인에서 존재감 확보에 나서는 인사들이 부쩍 늘었다. 문 대통령의 경제교사 중 한 명인 김현철 경제보좌관은 7월 29일 산업통상자원부 워크숍에 참석, 정부의 탈원전 홍보가 미흡하다고 질책했다. 일종의 군기반장 역할을 한 것이다. 이후 김 경제보좌관은 문 대통령 100일 직전 언론과 잇따라 인터뷰에서 기준금리 인상 등 ‘경제 정책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시장에서는 “김현철 리스크를 예의주시하라”는 말까지 나왔다. 보수야당 한 인사는 “월권이 아니냐”라고 비판했다.
‘왕수석’ 김수현 사회수석도 언론의 전면에 섰다. 청와대 정책실의 핵심이지만 조용한 성품 탓에 언론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정책을 총괄했다. 하지만 ‘현역 실세’ 장관인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휴가 중 돌아와 ‘8·2 부동산’ 정책을 발표한 뒤 김 수석은 다음 날 청와대에서 “강남 부동산 가격은 지극히 비정상”이라며 시장에 강력한 시그널을 보냈다. 그간 정책 조율 뒤 기재부가 발표한 것과는 판이하다. 문 대통령이 ‘8·2 부동산’ 정책 발표 직전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면 기획재정부에 피자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부동산 대책 발표 과정 어디에도 ‘변양균 라인’은 보이지 않았다.
관가 안팎에선 ‘늘공(직업공무원을 빗댄 신조어)’ 김동연 부총리가 ‘왕수석’ 김수현 사회수석과 ‘어공(어쩌다 공무원이 된 실세 정치인이나 교수)’ 김현미 장관 때문에 영이 안서고 있다는 푸념이 나온다. 왕수석과 실세 정치인 장관 사이에 포위돼 있다는 얘기다. 또한 부경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 홍장표 경제수석의 힘 강화로 김 부총리 포지션은 더욱 좁아지고 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일부 장관이나 경제 참모그룹이 경제 정책을 밀어붙인다는 주장도 파다하다. 1년도 채 남지 않은 2018년 6·13 지방선거가 문 대통령 친위대 그룹 권력다툼의 핵심 원인이라는 얘기다. 현재도 청와대 일부 인사들은 비보도를 전제로 OOO 출마설을 흘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차기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친문 중 친문인 윤건영 국정상황실장 등도 정부 정책에 깊숙이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에서는 추미애 대표를 비롯해 우원식 원내대표, 김태년 정책위의장 등이 핵심이다. 외교·안보 이슈에선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송영무 국방부 장관보다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의 행보가 더 주목받는다. 군기반장 시어머니가 제법 많은 셈이다.
참모그룹의 튀는 행보는 정권초반부터 불거졌다.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특보인 문정인 연세대 교수 등이 잇따른 돌출 발언이 이어지자, “장관을 능가하는 상장관이 출현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문 교수는 지난 6월 ‘워싱턴DC 발언’과 ‘뉴욕 세미나’ 등에서 조건부 ‘한·미 합동군사훈련’과 ‘전략자산 축소’ 등을 주장했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 추가 배치와 관련해선 미국의 인내심을 요구했다.
자유한국당 한 의원은 “한·미 동맹에 구멍을 내자는 것이냐”라고 비판했다. 국민의당 중진 의원도 “참으로 우려스러웠던 발언”이라고 꼬집었다. 문 교수를 가리켜 ‘장관 위의 장관’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도 이런 까닭이다. 정치권 한 인사는 “여의도 정국이 내년 지방선거 체제에 들어갈 경우 청와대 인사들 중 핵심 인사들이 이탈할 것으로 본다”라며 “이 경우 문재인 정부 1기 내각은 지방선거용 인사였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