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최준필 기자
2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41부(부장판사 권혁중)는 기아차 노조 2만 7458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의 변론절차를 모두 종결하고 오는 31일 선고한다고 밝혔다.
이번 소송은 기아차 생산직 근로자들이 지난 2011년 10월 통상임금과 관련해 집단소송을 청구하면서 시작됐다. 노조 측은 연 700%에 이르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고, 단체협약 기준에 의해 각종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며 사 측에 7220억 원을 청구했다. 이번에 선고가 내려진다면 5년 만에 1심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기아차 노조 측이 승소할 경우 지난 2008년 10월부터 2011년 10월까지 과거의 임금을 소급해 지불하는 등 기아차가 부담해야 할 금액이 최소 1조 원에서 최대 3조 원대에 달한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번 판결의 향방은 재판부가 사 측이 주장한 신의칙 항변을 받아들이느냐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신의칙이란 ‘권리의 행사와 의무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해야 한다’는 민법 제2조 1항을 지칭한다. 회사가 어려워질 줄 알면서도 근로자가 무리하게 임금을 올려달라는 것은 회사와 신뢰를 깨뜨린다는 것이다.
기아차 사 측은 지금까지 임금협상 과정에서 노사합의에 따라 상여금은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았던 만큼 신의칙에 따라 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간주할 수 없고, 인정되더라도 과거 분까지 소급해서 줄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재계에서도 재판부의 신의칙 적용 여부에 눈길을 쏠리고 있다. 현재 한국GM과 현대증공업, 아시아나항공, 한진중공업, 두산엔진 등이 통상임금 소송을 진행 중이다. 만약 기아차의 이번 소송에서 패소해 그 결과가 판례가 된다면, 기업들은 부담해야 하는 청구액은 물론 앞으로 연간 수천억 원대의 인건비가 추가로 발생할 수 있다.
기아차의 경우 중국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여파 등으로 실적 악화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통상임금 소송까지 패소한다면 경영위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난 상반기 영업이익 7870억 원을 기록한 기아차가 소급분으로 최대 3조 원을 ‘충당금’ 형태로 회계장부에 반영하면 당장 3분기부터 영업이익 적자가 불가피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기아차가 투자 위축과 긴축 경영을 펼친다면 그 여파는 1~3차 협력사 전반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중국 사드 사태 이후 사실상 차입경영을 하고 있는 기아차가 적자까지 맞게 되면 유동성 부족에 따른 경영위기를 겪게 될 수 있다. 완성차업체의 경영난은 부품업계 경영난으로 이어지고, 부품 공급망이 무너지면 다시 완성차업체도 타격을 받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며 “현대차그룹 뿐만 아니라 부품업계 등 산업계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관계자는 “통상임금 소송으로 인건비 등 고정비가 상승할 경우 기업은 투자와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구조조정을 통한 인위적인 인력감축에 나설 수도 있다. 일자리 창출 동력을 상실하는 것”이라며 “이번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에서 법원이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다.
실제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는 “통상임금 판결 영향으로 완성차와 부품사에서만 2만 3000명이 넘는 일자리가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학계에서도 통상임금 부담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21일 ‘통상임금 논란의 쟁점과 판결 이후 과제’ 토론회에서 “통상임금에 대한 법원의 판결 이후 노동현장에서 많은 갈등이 증폭되고 있다”며 “법원의 사후 개입으로 임금이 상승하고, 노사갈등으로 임금이 균형임금으로 하락하지 못하면 기업의 수요곡선에 의해 실업이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의칙 적용은 법원마다 판결이 엇갈리고 있다. ‘기업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의 범위에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금호타이어가 통상임금 항소심에서 신의칙을 이유로 사 측이 승소를 거둔 점은 기아차에 유리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지난 18일 광주고법 민사1부(부장판사 구회근)는 금호타이어 노조원 4명이 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2심 재판부는 “상여금이 통상임금에 포함돼 노사가 합의한 임금수준을 넘어선다면, 회사에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안겨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 존립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며 “금호타이어의 신의칙 항변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했다.
한편, 기아차 관계자는 이번 소송에 대해 “자동차산업의 위기로 일자리 창출에 비상이 걸려있으며, 이번 판결은 부품사와 산업계 전반의 미래 경쟁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재판부가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해 현명하게 판단해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