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 게이츠에 이어 세계 2위 갑부로 선정된 멕시코 ‘카르소 기업’의 카를로스 슬림 헬루 명예회장. 사진은 지난 2005년 3월 2일 파나마에서 열린 행사에서 그가 연설하던 모습이다. AP/연합뉴스 | ||
‘멕시코에서는 슬림의 재산을 불려주지 않고는 단 하루를 보낼 수 없다.’
이는 슬림이 운영하고 있는 회사가 얼마나 다방면에 걸쳐 있는가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카르소 기업’은 그야말로 경제 전반에 걸쳐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거대한 기업이다.
현재 그가 소유하고 있는 대표적인 회사로는 가장 큰 수익을 창출하는 무선통신회사인 ‘아메리카 모빌’과 유선통신회사인 ‘카르소 글로벌 텔레콤’이 있다. 이밖에도 그는 레스토랑 체인 ‘산보른스’, 멕시코 최대 담배회사 ‘시가탐’, 타이어 회사 ‘엘 센테나리오’, 알루미늄 제조회사 ‘레이놀즈 알루미니오’, 타일 제조회사 ‘에우츠카디’, 인터넷 서비스 업체 ‘프로디지’, 컴퓨터 회사 ‘ComUSA’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체도 소유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슬림 제국’은 현재 멕시코 전체 국민총생산(GNP)의 6.3%를 창출하는 효자 기업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또한 현재 멕시코 주식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 중 50%는 전부 ‘슬림 제국’의 것이며, ‘슬림 제국’에서 일하는 직원만도 20만 명에 달할 정도다.
<포브스>가 지난 4월 발표한 바에 따르면 그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가치는 531억 달러(약 50조 4000억 원)에 달한다. 빌 게이츠의 560억 달러(약 53조 2000억 원)보다 고작 30억 달러(약 3조 원)가 모자라는 액수다. 이에 슬림이 빌 게이츠를 밀어내고 1위로 등극할 날도 머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지난 2004년 세계 갑부 순위 17위였던 그는 2005년에는 4위, 그리고 2006년에는 3위로 치고 올라왔다.
4년 전인 2003년만 하더라도 그의 재산 가치는 74억 달러(약 6조 9000억 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의 재산은 급격하게 불어났다. 지난 두 달간 증가한 재산만 무려 40억 달러(약 3조 8000억 원)에 달했다. 이는 각각 15%, 4%씩 상승한 카르소 글로벌 텔레콤 주가와 아메리카 모빌의 주가 덕분이었다.
그가 주식으로 하루에 벌어들이는 금액이 3850만 달러(약 360억 원)라는 계산도 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슬림을 세계 2위의 갑부 자리에 올려 놓은 것은 멕시코 경제의 급성장 덕분이다. 작년 한 해 멕시코의 주식시장은 49%나 급등했으며, 이에 따라 지난 1년 2개월 새 슬림의 재산도 230억 달러(약 21조 원)나 증가했다.
하지만 슬림은 이런 성장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세계 최고 갑부의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주식시장이란 게 갑자기 오르기도 하고 또 내리기도 하는 것 아니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멕시코의 미다스 손’이라고 불리는 슬림은 ‘천부적으로 투자에 강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아 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80년대 중반 멕시코 경제가 침체되었을 때 그가 보여준 과감한 행보였다. 당시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멕시코를 빠져 나갔던 것과 달리 그는 반대로 멕시코 기업에 투자하거나 쓰러져 가는 기업들을 인수했다. 당시 헐값에 인수했던 기업들의 가치는 불과 10년이 지나자 평균 3000%가량 증가했다.
그가 성공한 데에는 이처럼 타고난 동물적인 투자 감각 외에도 주식시장의 흐름을 재빠르게 읽는 천재적인 재능도 한몫했다. 성공적인 주식 투자에 대한 그의 원칙은 의외로 간단하다. “모두가 팔 때 사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의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도 성공 열쇠 중 하나였다. 암산 실력이 뛰어난 그는 기업체의 수익구조를 계산기나 컴퓨터 없이 머리 속으로 재빨리 파악하는 비상한 재주를 갖고 있다.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도 컴퓨터를 전혀 다룰 줄 모른다고 한다. 그는 “기업을 운영하는 데 있어 오로지 필요한 것은 내 머리와 검은색 작은 노트 하나면 충분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의 이런 뛰어난 사업 수완과 비상한 재능은 사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이기도 했다. 1902년 레바논에서 멕시코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번 이민 1세대였다. 그의 아버지는 1920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난 후 혼란스러웠던 틈을 타 멕시코시티의 몇몇 부동산을 헐값에 사들였다. 이때 매입한 부동산은 훗날 엄청난 가치의 금싸라기 땅으로 둔갑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슬림이 일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있는 텔멕스 회사 건물. 텔멕스 인수로 카를로스 슬림의 오늘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
그가 아버지로부터 배운 가장 큰 경제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싼값에 물건을 대량으로 팔아서 항상 수중에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어라.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투자해라.”
대학 졸업 후 결혼과 동시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부동산을 토대로 그의 본격적인 사업은 시작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이민 2세들이 그랬듯이 그 역시 그럴싸한 단독주택을 짓고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집을 짓는 대신 그는 이 땅에 고층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에는 자신의 가족이 살 집과 함께 세를 놓을 수 있는 집을 네 가구 지었고, 나머지는 분양을 해서 현금을 챙겼다.
1965년 증권 브로커 회사를 설립한 그는 당시 멕시코의 주식시장이 요동치는 데도 불구하고 한발 앞선 정보력과 판단력으로 승승장구하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부터 그는 어릴 때부터 모은 돈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 40만 달러(약 3억 7000만 원)를 가지고 본격적인 투자 사업을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여러 개의 소규모 회사들을 본격적으로 인수하기 시작했다. 수익만 창출할 수 있다면 분야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동차 부품 회사, 자전거 부품 회사, 레스토랑, 소매점 체인, 백화점, 제과점, 타일 제조회사 등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1990년에는 여러 회사들을 한데 모은 거대한 지주 회사인 ‘카르소(CARSO)’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멕시코 최고의 갑부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1990년 ‘세기의 매각’으로 불리는 ‘텔멕스’를 인수하면서였다. 당시 국영 통신업체였던 ‘텔멕스’의 민영화 과정에 참여했던 그는 20%의 주식을 확보하면서 이 회사를 17억 5000달러(약 1조 6000억 원)에 인수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텔멕스 주식은 2달러(약 1800원)에 불과했지만 3년 후에는 56달러(약 5만 원)로 치솟았다.
이처럼 텔멕스의 주가가 치솟자 그의 재산도 꾸준히 증가했다. 1996년 61억 달러(약 5조 7000억 원)에 불과했던 재산은 2005년에 300억 달러(약 28조 원), 그리고 2007년에 531억 달러(약 50조 4000억 원)로 900%가량 급속히 증가했다.
최근 그는 남미로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남미 16개국에서 통신업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의 최대 통신회사인 ‘베리손 코미니카’를 인수했으며, 콜롬비아 케이블 방송국인 ‘슈퍼뷰’와 ‘케이블 파시피코’를 인수하기도 했다. 또한 브라질의 통신회사인 ‘엠브라텔’도 이미 그의 소유가 됐다.
현재 공식적으로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그는 명예회장직만 보유하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영권을 세 아들들과 사위에게 물려주었지만 여전히 최종적인 의사결정권은 그에게 있다.
요즘 그가 관심을 보이고 있는 분야는 다름 아닌 기부와 사회사업에 대한 투자다. 어쩌면 독점 기업이라는 비난 속에 하는 수 없이 택한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올해 들어서 “남미의 발전과 고용 성장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는 발표를 여러 차례 해왔다.
멕시코 최대의 개인 자선단체인 ‘텔멕스 재단’을 통해서 그는 앞으로 4년간 건강 및 교육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시골 마을의 병원 건립, 암연구 센터 설립, 교사 양성 등을 약속하기도 했다.
사실 그에 대한 사회적인 평판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부패나 부정 등의 혐의를 받은 적이 없으며, 1999년 부인이 신장 질환으로 사망한 후에도 여전히 스캔들 없이 깨끗한 사생활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만 봐도 그렇다. 흔히 억만장자가 그러하듯 모델이나 영화배우와 염문설 같은 것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또한 그는 비교적 검소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억만장자가 된 이후에도 수년간 햇빛이 들지 않는 지하실을 사무실로 사용했으며, 여전히 값비싼 맞춤 양복 대신 평범한 기성복을 즐겨 입고 있다. 그의 유일한 사치라고는 값비싼 하바나 시가를 태우는 것이다.
가정적인 아버지로도 평판이 좋은 그는 바쁜 스케줄 속에서도 매주 월요일마다 빠지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곤 한다.
하지만 ‘악덕 기업주’라는 비난도 끊이지 않고 있다. 다른 남미 국가에 비해서 유난히 비싼 통화 요금만 보더라도 그렇다. 멕시코 유선통신 시장의 90%를 점유하고 있는 텔멕스가 불합리하게 통신시장을 독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멕시코 대통령은 앞으로 멕시코의 통신업체를 다양화해서 경쟁을 유도할 방안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찌 됐든 현재로서는 멕시코 사람들이 수화기를 들 때마다 슬림의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속도라면 정말 그가 빌 게이츠를 제치고 세계 1위 갑부 자리에 등극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지 모른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