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P/연합뉴스 | ||
60~70년대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등의 음반을 제작하면서 미국의 전설적인 프로듀서로 명성을 얻었던 필 스펙터(67·사진)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내뱉은 말이다. 그의 광기 어린 눈빛과 괴상하리만치 부풀어오른 퍼머머리, 그리고 괴팍한 행동들을 보노라면 그의 이런 말이 실감이 나는 듯하다.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걸까. 현재 그는 한 무명 여배우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 중이며, 만일 유죄가 확정될 경우에는 최고 종신형이 내려질 위기에 처해 있다. 평소 그가 사람들 앞에서 권총을 휘두르기를 좋아했다는 점, 그리고 사건 당일 운전기사에게 자신의 범행을 고백하다시피 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번 사건은 그에게 불리하기만 하다. 그의 재판은 지난 1995년 미식축구선수 O.J. 심슨의 부인 살인사건 재판 이후 유명인사로는 처음으로 미 전역에 생중계되면서 미국인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탕!’
2003년 2월. 새벽 5시가 조금 못 된 시각 LA 근교의 앨햄브라에 위치한 스펙터의 저택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밖에 주차해 놓은 리무진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 아드리아노 데 소우는 심상치 않은 총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얼마 후 주인인 스펙터가 허둥지둥 뒷문을 통해 달려 나오는 것이 보였다. 피 묻은 손에 권총을 들고 있던 스펙터는 운전기사에게 “내가 사람을 쏜 것 같다”고 말했고 놀란 그는 곧 스펙터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의 시체가 보였다. 두 시간 전쯤 주인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던 바로 그 금발의 여자였다. 입을 벌려 총을 쏜 듯 사방에는 부러진 이빨의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하지만 옷들은 그대로 입고 있었으며, 호피무늬 핸드백을 어깨에 맨 채 쓰러져 있었다.
곧 경찰이 출동했고, 흥분을 가라앉힌 스펙터는 이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여자가 ‘실수로’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되었으며, 며칠 후 100만 달러(약 9억 원)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스펙터의 저택에서 시체로 발견된 여성은 영화배우 라나 클락슨(40)이었다. 간간히 B급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그녀는 할리우드의 ‘하우스 오브 블루스’라는 클럽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다.
▲ 숨진 라나 클락슨. | ||
그렇게 집으로 들어간 후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스펙터 본인만이 알고 있는 일.
한사코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그는 “나는 절대로 취해 있지 않았다. 취한 건 오히려 클락슨이었다”고 말했으며, 클락슨이 총을 쏘기 전 권총에 입을 맞추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그 여자는 상당히 취해 있었고 매우 시끄러웠다. 그 여자가 그 총을 어디서 갖고 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갑자기 총을 꺼내더니 입을 맞추고는 입 안으로 총부리를 겨누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정말 그녀는 자살한 걸까. 아니 적어도 클락슨 본인의 실수에 의한 사고였을까.
스펙터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그럴 듯한 정황도 있다. 당시 클락슨의 왼쪽 다리 옆에는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이 놓여 있었는데 이 권총에서는 스펙터의 지문이 검출되지 않았다. 또한 스펙터의 변호인은 포르투갈 출신의 운전기사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을 들면서 혹시 그가 그날도 당황한 스펙터의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은 것 아니냐는 반론을 폈다.
그럼에도 의문점은 남아 있다. 먼저 클락슨이 자살을 할 정도로 평소 우울증을 앓지 않았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없었다는 점이 그렇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항상 발랄하고 긍정적이었으며, 단 한 번도 자살을 입밖에 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 필 스펙터가 생전의 존 레넌(사진 오른쪽)과 함께 찍은 다정한 사진. 스펙터는 레넌의 ‘이매진’ 음반을 제작했다. | ||
한편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스펙터의 기이한 행동들도 문제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스펙터가 권총으로 자신을 위협했다고 증언한 여성들만 무려 네 명이나 나왔기 때문이다.
멜리사 그로스베너라는 여성은 지난 1992년 캘리포니아에 있는 스펙터의 집에 놀러 갔다가 권총으로 위협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저녁식사를 마친 후 집을 나서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얼굴에 권총을 겨누면서 “만일 여기서 나가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는 것. 스테파니 제닝스라는 여성 역시 1995년 한 호텔방에서 술에 취한 스펙터에게 권총으로 위협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그는 녹음실에 종종 총을 들고 나타나서는 자랑하듯 휘둘렀는가 하면 한번은 실제 천장에 대고 총을 발사한 적도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155㎝의 작은 키와 왜소한 체구 때문이었을까. 평소에도 늘 총을 소지하고 다닌 그는 권총만 들면 자신감에 충만해 있는 듯했고,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듯 행동하곤 했다. 이번 사건이 그의 우발적 살인이었는지 아니면 죽은 여자의 실수였는지는 조만간 법정에서 밝혀질 예정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