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경의중앙선 지하철이 오가는 왕십리역은 ‘지하철판 버뮤다 삼각지대’로 불립니다. 퇴근길에 왕십리역 경의중앙선을 이용하는 직장인들이 붙인 별칭입니다. 도대체 직장인들은 왕십리역을 왜 이렇게 부를까요?
8월 29일 오후 6시경 기자는 직접 왕십리역을 찾아 경의중앙선을 타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버뮤다 삼각지대의 실체가 궁금했습니다. 왕십리역 승강장에 도착한 순간 경악할 만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왕십리역 승강장 전경 사진
기자는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용문-덕소-회기행 경의중앙선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줄이 그 반대편 옥수-용산-문산행 경의중앙선 승강장 쭉 이어졌습니다. 에스컬레이터 왼편이 보이시나요? 서로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왕십리역 승강장 사진
이렇게 길게 늘어선 줄은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2호선 지하철로 갈아타기 위해 내려가는 시민들의 표정은 짜증스러움 그 자체였습니다.
출구와 승강장 사이에 몰려있는 ‘인간띠’가 보이시나요? 이곳 역시 단단히 가로막힌 벽이었습니다. 기자는 가까스로 줄을 섰습니다. 6시 24분에 도착 예정인 덕소행 지하철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덕소행 지하철이 도착한 시간은 6시 30분이었습니다. 6분이 지연된 셈입니다. 게시물에 올라온 시민들의 성토가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지하철의 문이 열리는 순간 두 눈을 의심할 만한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시민들이 마치 실제 축구경기를 하는 것처럼 서로 몸싸움을 하면서 지하철 문 쪽으로 몰려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지하철에 가까스로 탑승한 사람들은 혹시 자동문 앞에서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습니다.
기자는 결국 지하철에 타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청량리역 지연 관계로 우리 열차는 왕십리에서 3분간 정차하겠습니다”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지하철은 결국 6시 36분에 출발했습니다. 무려 ‘12분’이 지연된 것입니다.
이튿날, 기자가 찾은 회기역도 상황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이 승강장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습니다. 덕소행 지하철은 6시 31분에 와야 했지만 이미 6시 24분에 도착 예정인 용문행 지하철도 오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갑자기 “춘천행 급행열차 사정으로 인해 10분정도 지연됐습니다. 전동열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네이버 지하철 노선도 캡처 사진
경의중앙선 ‘왕십리역-회기역’ 구간은 연착이 밥 먹듯이 발생하는 ‘헬 게이트’ 노선으로 불립니다.
왕십리역은 2호선, 5호선, 분당선, 경의중앙선이 모이는 메머드급 환승역입니다. 서울시청과 여의도, 성남시 분당구에 직장을 두고 경기도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이 수난을 겪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오후 6시 이후에 ‘왕십리역-회기역’ 구간에서 연착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코레일 관계자는 “퇴근길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승객이 많으면 타고 내리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역마다 30초 정도 늦는다고 가정하면, 10개 역을 지나면 벌써 300초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다른 코레일 관계자는 “경의중앙선은 열차 숫자가 적어 운행 횟수가 적습니다. 노선도 긴 편입니다. 청량리역에서 인천역으로 가는 1호선은 3분과 5분에 한 대씩 있지만 경의중앙선은 다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코레일 측은 출퇴근 시간의 특성과 운행 횟수를 연착의 이유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노선의 중첩’ 때문입니다.
먼저 ‘용산역-왕십리역’ 구간에선 ITX -청춘 열차, 화물열차, 경의중앙선 전동 일반열차가 같은 선로를 사용합니다. 경의중앙선의 열차 ‘시간표’가 지연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경의중앙선 관계자는 “서울역부터 화물열차가 왕십리역과 청량리역 쪽으로 쭉 내려옵니다. 하선으로 내려오는 차는 그 선으로만 와야 해요. 우선순위가 높은 차를 먼저 보냅니다. 특히 ITX 청춘 열차는 용산역에서 오는데 일반 전동 열차가 앞에 있으면 길을 비켜줘야 해요. 전동 열차가 대피하고 ITX 청춘열차가 먼저 가기 때문에 그만큼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ITX 청춘 열차는 2012년 개통된 최대 시속 180km로 달리는 열차입니다. 용산역에서 춘천행 ITX-청춘 열차를 탈 수 있습니다.
국내 처음으로 경춘선에 투입되는 최대 시속 180km 준고속열차인 `ITX-청춘‘이 28일 개통했다. 사진은 ITX 열차가 춘천역으로 들어오는 모습. 연합뉴스
2016년 코레일 운전취급규정 제 50조에 의한 열차등급의 순위는 아래와 같습니다.
0. 대통령 전용열차, 위험물 수송열차,
1. 고속여객열차 : KTX / KTX-산천 / SRT, 광명셔틀
2. 특급여객열차 : ITX-청춘
3. 급행여객열차 : ITX-새마을 / 새마을호열차, 무궁화호열차 / 누리로열차, 급행전동열차
4. 보통여객열차 : 통근열차 / 일반전동열차(코레일과 직결하는 서울메트로 소속 열차 포함, 광명셔틀은 고속여객열차)
5. 급행화물열차
6. 화물열차 : 일반화물열차
7. 공사열차
8. 회송열차
9. 단행열차
10. 시험운전열차
열차등급 순위표에 따르면 경의중앙선은 ‘보통’, ITX-청춘은 ‘특급’ 열차로 분류됩니다. ITX-청춘 열차가 만약 지연됐다면 경의중앙선은 피해주고 ITX- 청춘 열차가 지나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용문행 방향 경의중앙선 선로 사진.
용산역에서 춘천 방향 쪽으로 뻗어있는 선로 사진입니다. 수많은 선로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보이시나요? 같은 선로를 사용하기 때문에 경의중앙선의 ‘대피’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잦은 연착의 원인입니다.
청량리역은 상황이 더욱 심각합니다. 청량리역 관계자는 “상봉역 이전까지 수많은 열차들이 선로 하나를 같이 씁니다. 새마을호, 무궁화호, 화물열차, 경의중앙선 전동 일반열차, 경춘선 전동 급행열차, ITX-청춘이 서로 물리고 물리면서 열차가 연착합니다”고 밝혔습니다.
용산역-왕십리역 구간은 중앙선 전동 일반열차, ITX -청춘 열차, 화물열차가 선로를 함께 쓰지만 청량리역에서는 여기에 경춘선 전동 급행열차, 새마을호, 무궁화호가 새롭게 추가됩니다. 청량리역 또는 회기역을 이용하는 승객들이 가끔 “선행열차를 먼저 보내는 관계로 열차가 지연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을 듣는 이유입니다.
열차등급상 무궁화호는 ‘급행’열차입니다. 경의중앙선은 후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체의 연속은 구리역으로 이어집니다. 구리역 관계자는 “청량리에서 출발한 무궁화호를 보내기 위해 역에서 정차하는 경우가 있어서 연착이 잦습니다. 화물열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끌 수밖에 없어 시민들이 불편을 느낍니다. 경의중앙선은 다른 노선과 달리 같은 선로를 쓰는 곳이 많습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꾸역꾸역 왕십리역 통과한 경의중앙선은 청량리역에서 다시 한 번 위기를 겪습니다. ‘경춘선 급행 전동 열차’라는 암초를 만나기 때문입니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경춘선 급행 전동 열차의 목적지는 춘천입니다. 경의중앙선 ‘틈’사이를 또 비집고 들어옵니다. 경의중앙선은 ‘일반’ 열차이기 때문에 또 다시 후순위로 밀려납니다. 또 다시 대피가 이어지고 연착이 반복됩니다.
그렇다면 반대편인 문산행 경의중앙선은 어떨까요? 퇴근길에 문산행이나 대곡행 경의중앙선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불편도 상당합니다.
‘경의중앙선 통학러들의 한숨소리’ 페이스북 페이지 캡처
심지어 페이스북엔 ‘경의-중앙선 통학러들의 한숨소리’라는 모임이 등장했습니다. 문산행과 대곡행 경의중앙선은 서강대역과 홍대입구역을 지나갑니다. ‘경의-중앙선 통학러들의 한숨소리’는 서강대와 홍익대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경의중앙선’에 대한 애로사항을 공유하는 모임입니다. 이들 사이에서 경의 중앙선은 경의중 ‘암’선으로 불립니다.
네이버 지하철 노선도 캡처
퇴근시간, 문산행 경의중앙선은 ITX-청춘열차와 부대끼면서 열심히 달려옵니다. 하지만 승부의 결과는 뻔한 것이지요. 대피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경의중앙선은 이촌역에 도착하면 또 하나의 변수를 만납니다.
경의중앙선 이촌역 관계자는 “용산역에 선로를 같이 쓰는 차량이 많습니다. 안전운행을 위해 간격 유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경의중앙선은 이촌역에서 서행하거나 정차하고 대기하기도 합니다. 용산역은 ITX-청춘와 KTX가 오가는 선로가 중복되는 곳입니다”고 설명했습니다.
심지어 이촌-용산역 구간은 ‘절연구간’입니다. 이촌역 관계자는 “교류전압하고 직류전압이 변경되는 구간입니다. 경의중앙선은 이곳을 지나갈 때 무전압 운행으로 서행을 합니다”라고 밝혔습니다.
용산역 관계자는 “두 역 사이는 전철의 전류 공급 방식이 다릅니다. 서로 다른 전기장치가 교차하면서 전기 공급이 잠시 끊깁니다. 용산에서 이촌구간에서 전기 장치를 바꿔줍니다. 열차를 주행하는 과정에서 별도 문제는 없습니다. 속도는 자연스럽게 떨어지지만 관성 때문에 많이 차이가 나진 않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거북이걸음을 반복한 경의중앙선이 ‘용산역’이란 거대한 파도를 넘어도 넘어야할 산이 또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끝판왕’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014년 6월 9일 인천시 서구 검암역 역사에 인천공항행 KTX가 들어서고 있다. 현재 시험운행 중인 이 KTX는 오는 30일께 정식 개통되는 서울역∼인천공항역 구간을 운행할 예정이다. 연합뉴스
바로 ‘고속’ 열차 KTX입니다. 가좌역 관계자는 “가좌역에서 KTX와 경의중앙선이 노선을 같이 사용합니다. 선로를 같이 쓰면 경합이 일어납니다. 용산역에서 출발하는 KTX나 무궁화호는 없지만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가 가좌역을 통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KTX를 안전하게 먼저 보냅니다”고 밝혔습니다.
DMC(디지털미디어시티)역 관계자는 “DMC역은 지상 역사입니다. 선로의 일부를 KTX와 함께 쓰고 있습니다. 서울역에서 행신역까지 들어가는 KTX와 반대로 행신에서 서울역이나 용산역 쪽으로 나가는 KTX가 경의중앙선과 선로도 함께 씁니다. 인천공항역으로 가는 KTX도 같이 씁니다. KTX를 먼저 보냅니다. 관제센터 쪽 규정이 그렇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문산행 경의중앙선에서 직장인들이 ‘지옥’을 맛보고 있습니다. 특히 파주와 일산에 사는 직장인들은 퇴근길에 경의중앙선을 기다리면서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합니다. 뒤늦게 도착한 경의중앙선을 탄다고 해도 도착 예정 시간은 훌쩍 지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의중앙선이 ‘지옥철’의 오명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뭘까요? 익명을 요구한 코레일 관계자는 “선로를 추가로 개설해야 합니다. 추가로 개설하지 않는 한 경의중앙선은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12월에 인천공항에서 평창을 거쳐 강릉까지 가는 KTX가 완성되면 선로사용량이 더욱 포화될 것입니다”고 우려를 드러냈습니다.
이에 대해 코레일 측은 “코레일이 선로를 추가할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철도시설공단이 국토해양부와 협의해서 선로를 추가하는 방법뿐입니다. 결국 지금 운행하는 선로 옆에 새로운 선로를 까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방법이 없습니다”고 답변했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KTX, ITX-청춘 등 신형 고속 열차가 개통됐습니다. 물론 경의중앙선 경춘선 등 지하철 노선도 늘어났습니다. ‘지하철’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는 전보다 훨씬 늘어났고 더욱 간편하게 ‘고급 열차’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경의중앙선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불편은 커지고 있습니다. 한정된 선로에 열차만 늘어난 탓입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경의중앙선의 연착은 반복될 것입니다. 시민들의 경의중앙선을 향한 성토도 한동안 이어질 듯합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