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은 없게 하겠다.” (문재인 대통령)
지난 7월 19일의 대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여야 4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발언을 했다.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 요청에 주저 없이 ‘모범답안’을 내놓은 것이다.
문재인 정부 인사가 사실상 마무리된 가운데 정부 산하 공공기관 수장 자리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전임 정부가 그러했듯 ‘낙하산 논란’이 빚어질지,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 대표에게 한 약속처럼 다른 행보를 보일지가 관전포인트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경남의 BNK금융지주 회장 선임이 뚜렷한 이유도 없이 계속 연기되는 등 공공기관은 물론, 금융권에서도 ‘낙하산 바람’이 표면화하고 있다. 시장 진입장벽이 높아 정부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금융권에서 낙하산 투하 가능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발언’에 대한 의심이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 공공기관장 빈자리 많다
공기업 수장 중에 가장 먼저 보따리를 싼 사람들은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경북(TK)권 본사 공기업의 기관장들이었다. 한국도로공사, 한국가스공사, 한국감정원 등 대구와 경북의 혁신도시 내 공공기관장들부터 잇따라 공석 사태를 빚기 시작했다.
김천혁신도시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경우, 김학송 전 사장이 사임한 이후 한 달 넘게 공석이다. 한국도로공사는 사장 선임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신임 사장은 11월쯤 윤곽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대구혁신도시의 한국가스공사 역시 이승훈 전 사장이 사표를 제출해 공석 상태다. 이 전 사장은 내년 6월까지 임기를 남기고 있었으나 중도 하차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등으로부터 박근혜정부 시절 노조의 동의 없이 성과연봉제를 강행했다는 이유로 ‘공공기관 적폐 기관장 10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사퇴 압박을 받았다. 한국가스공사도 임원추천위 구성 안건을 다음 이사회에 상정할 예정으로 새로운 사장 선임은 연말쯤 이뤄질 전망이다.
현재 기관장 자리가 비어 있거나 기관장이 사의를 표명한 정부 산하 공공기관은 20여 곳에 달한다. 임기가 끝났지만 후임자가 없어 자리를 지키고 있는 5곳과 3개월 내에 임기가 끝나는 17곳 등을 더하면 당장 공공기관장의 인선 작업을 서둘러야 할 곳은 줄잡아 40~50여 곳에 달한다. 정부 지정 공공기관은 공기업 35곳, 정부기관 89곳을 비롯해 모두 322곳인데 적잖은 공공기관이 리더십 공백 상태에 빠져 있는 셈이다.
수장이 공석인 TK의 공공기관 한 관계자는 “새 정부 들어 첫 국정감사가 곧 닥칠 예정으로 야당은 그 어느 때보다 강도 높은 국감을 할 것으로 보인다. 피감기관 입장에선 사장이 없으니 바람막이가 없는 셈”이라며 “누가 오더라도 빨리 와야 직원들의 피로가 덜한데 새 수장 임명은 현재로서는 기약이 없다”라고 하소연했다.
# 왜 빨리 안 채우나
빈자리가 많이 생겼는데도 임명이 이뤄지지 않는 것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낙하산, 코드인사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일단 공공기관장 인사를 최대한 늦춘다는 얘기가 가장 큰 목소리로 나온다.
여당의 한 당직자는 “아직 공공기관 자리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대선 과정에서 고생한 사람이 많고, 보수정권 10년 동안 야당을 하면서 여러 어려움을 겪은 이들도 적지 않다. 솔직히 당직자들이 이 부분에 대한 ‘조치’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이 당직자 얘기처럼 낙하산 투하 신호가 곧 떨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문 대통령이 비록 4당 대표 회동 당시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물리적인 상황이 이를 허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관장 낙하산은 최대한 미루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공공기관 상임감사 낙하산부터 시작할 것이란 관측도 많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 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7월말 기준으로 공석 또는 임기가 끝난 공공기관 상임감사 자리는 19개다. 여기에다 9개 공공기관의 상임감사가 올해로 임기가 만료된다. 새로 임명해야 하는 28개 상임감사 자리 가운데 현재 정치인·관료 출신이 앉아 있는 자리는 16개다. 한국도로공사·인천국제공항공사 등 누구나 자리를 탐내는 공공기관이 16개 안에 들어있다.
상임감사 임명권자는 공공기관 규모·성격 등에 따라 다른데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대통령, 기획재정부 장관 또는 관계부처 장이 임명권을 행사한다. 언뜻 보면 임명 권한이 분산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대 모든 정부가 상임감사 임명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해왔다는 것이 청와대 근무 경험자들이나 관계부처 공무원들의 한목소리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에선 공공기관 상임감사 낙하산 인사가 잇따랐다. 박근혜 대선캠프 재외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던 방송인 자니 윤이 2014년 한국관광공사 상임감사로 임명돼 논란을 빚었다. 비슷한 시기 금융 관련 경력이 전혀 없는 새누리당 경남도당 부위원장 출신 권영상 변호사가 한국거래소 상임감사에 앉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인 지난 3월 한나라당 평화통일위원장 출신 이상훈 씨가 한국가스공사 상임감사로 임명돼 노조에서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정권의 낙하산 유혹을 없애기 위해서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주요 공공기관장과 공기업 사장 후보에 대해 국회 인사청문회 제도를 도입하거나 임명추천위원회에 시민사회단체를 참여시켜 공개검증을 한다면 낙하산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정부 입김 센 금융권은?
박근혜 정부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금융권 수장들은 임기가 남았는 데도 알아서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첫 신호탄은 정찬우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쐈다. 정 이사장은 8월 17일 열린 임원회의에서 사퇴 의사를 표명한 뒤 ‘임직원 여러분께 드리는 글’을 발표, “한국거래소를 떠나려 한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10월 거래소 이사장에 취임, 임기는 2019년 9월까지다. 임기를 2년이나 앞당겨 자리를 비운 셈이다.
정 이사장도 취임 당시 낙하산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금융권의 대표적인 친박 인사로 꼽혀왔다. 박근혜 당선자 시절인 2013년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에서 경제1분과 전문위원으로 활동한 뒤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을 지냈다. 친박 실세로 알려지면서 거래소 이사장 임명 당시 공식 선임절차가 진행되기 전부터 내정설이 퍼지기도 했다.
박인규 DGB금융지주 회장 겸 대구은행장도 최근 사퇴설에 휘말렸다. 박 회장은 8월 17일 서울에서 금융위원회 고위 관계자와 면담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이유에 대해 관심이 쏠렸다. 그도 임기가 아직 많이 남았다. 2014년 취임한 박 회장은 지난 3월 연임에 성공, 임기가 오는 2020년까지다.
박 회장은 친박 핵심과 가깝다는 풍문이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때문에 새 정부 들어 그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대구경찰청이 비자금 조성 등 대구은행 관련 의혹을 내사 중이라는 소식까지 알려지면서 ‘박인규 흔들기’가 본격화됐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 참여정부 인맥 낙하산 투하 임박
차기 KDB산업은행장으로 이동걸 동국대 초빙교수(64), 한국수출입은행장에 은성수 한국투자공사(KIC) 사장(56)이 각각 내정된 것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청와대가 이 교수와 은 사장을 각각 산업은행장과 수출입은행장 단독 후보로 내정하고 막바지 검증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참여정부 인맥이다. 2003년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재정·금융 정책을 조언했고 2004년엔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은 사장은 기재부 국제금융정책국장, 국제경제관리관 등을 지내고 지난해 초 KIC 사장으로 옮긴 공무원 출신이다. 금감원장은 김조원 전 감사원 사무총장(60)이 유력한 상황이다. 김 전 사무총장 역시 2003년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에 임명되며 승승장구했던 사람이다.
문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경남의 BNK금융지주 회장 인선은 전국적 관심 대상이 됐다. 정권의 낙하산 논란이 가장 먼저 불거지면서 회장 선임 일정이 계속 연기되고 있으며 부산·경남 언론은 낙하산에 대해 강력 반발하는 중이다.
현재 BNK금융 회장의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김지완 전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부산상고 동문으로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서 경제고문 역할을 했다. 만 71세인 그는 하나금융 부회장을 지냈지만 주로 증권을 맡아 은행 경영 경험이 사실상 없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캠프에 있었던 터라 낙하산 인사라는 비판은 더욱 커지고 있다.
금융권 낙하산은 전임 정권에서도 시끄러운 소리를 만들었다. 이명박 정권에선 ‘4대 천왕’이 등장했었다. 김승유 전 하나금융지주 회장, 이팔성 전 우리금융지주 회장, 어윤대 전 KB금융지주 회장, 강만수 전 KDB금융그룹 회장은 이 전 대통령과는 고려대 동문 또는 소망교회 인맥으로 금융권 고위층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권이 바뀐 뒤엔 각종 혐의로 당국의 조사나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엔 이들이 비운 자리를 박 전 대통령 출신학교인 서강대 인맥 ‘서금회’가 채웠다. 홍기택 전 KDB금융그룹 회장, 이덕훈 전 수출입은행장, 홍성국 전 대우증권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국민의당 채이배 정책위 수석부의장은 8월 17일 원내 정책회의에서 김지완 전 하나금융지주 부회장이 BNK금융지주 회장 후보군에 포함된 것 등과 관련, “지배구조 개선 관련 법률에 따라 CEO 경영승계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이것이 제대로 운영되도록 하는 법치 시스템이 작동하게 해야 한다. 두 번 다시 금융회사에 대한 관치금융, 낙하산 논란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 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