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 오후 서울 SRT수서역에서 열차 옆으로 시민들이 이동하고 있다.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연합뉴스.
기장이 경북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 경계 부근(서울 기점 220㎞ 지점)에서 열차를 급히 세운 것입니다. 약 810명의 승객들은 열차의 급정거로 ‘패닉’에 빠졌습니다.
SRT 측은 지연 도착과 관련해 안내방송을 반복했지만 승객들은 극도의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열차 안에서는 냉방장치가 작동해 일부 승객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
코레일과 SRT 측이 열차를 수리한 뒤 오후 11시 5분경 열차는 다시 운행을 시작했지만 이미 3시간이 지연된 상황이었습니다.
수리 시간이 길어지면서 후속 열차들은 반대편 선로를 이용해 사고 지점을 통과했습니다. 부산 방향 열차는 물론 KTX와 SRT 열차 54대의 운행이 지연됐습니다. 승객 약 2만 8000 명이 피해를 입은 셈입니다.
인스타그램 캡처.
SNS 상에서도 제보가 쏟아졌습니다. 당시 KTX에 타고 있었던 승객은 인스타그램에 “좀비만 없다뿐이지 무섭다. 동대구에서 정차중인데 언제출발할지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SRT 측은 수리한 열차를 대전역까지 옮기고 승객들에게 대체교통편을 제공했지만 승객 대부분은 그대로 열차를 타고 수서역까지 이동했습니다.
SRT 측은 또 열차 안에 갇혔던 승객들에게 보상 원칙에 따라 열차요금(현금)의 50% 또는 무료승차권 1매씩을 제공하기로 했지만 승객들의 원성은 잠잠해지지 않았습니다.
SRT 공식 페이스북 캡처
그렇다면 이번 사고의 원인은 뭘까요?
사고 당시 ‘SRT’와 ‘괴물체’라는 단어는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체’가 날아들어 열차 바퀴 주변 ‘스커드’라는 부품 사이에 끼면서 열차가 멈췄다는 이야기가 돌았기 때문입니다.
코레일은 이튿날 “경부고속철도 김천구미역과 영동역 사이에서 부산역을 출발해 수서역으로 향하던 SRT 제362열차 운행중단 사고는 동물이 열차에 부딪히면서 난 것으로 추정됩니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어떤 동물이 시속 300㎞로 달리는 열차를 멈추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사진으로 봤는데 육안으로 식별이 어렵습니다. 이미 사체가 분해되고 처참해진 상태였습니다. SRT의 속도가 워낙 빨라 동물이 부딪혀도 파악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멧돼지나 고라니로 추정하고 있습니다”고 밝혔습니다.
사슴과에 속하는 포유동물 고라니. 연합뉴스
문제는 야생동물이 KTX선로에 뛰어들어 일어나는 고속 열차 사고가 오래 전부터 수차례 반복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레일킬’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12년 3월 2일 강원 양구군 최전방 민간인 통제구역에서 멧돼지 일가족이 지뢰 표지판 사이로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코레일에 따르면 KTX가 개통한 2004년 4월부터 2011년까지 야생 동물(조류 포함)에 의한 운행 지장사례가 총 14건에 달했습니다. 동물별로는 고라니 등 포유류 9건, 부엉이 등 조류 5건이 사고의 원인이었습니다. 포유류는 공기호스 및 하부 패널 등을 파손시켰고, 조류는 전차선과 접촉해 단전장애를 일으켰습니다.
‘데자뷔’일까요? 불과 2년 전에도 승객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사고 일어났습니다. 2015년 10월 31일 서울을 출발해 부산으로 가던 KTX 열차는 충북 영동 부근에서 비상 정차를 했습니다.
멧돼지 한 마리가 철로로 뛰어들어 열차 앞부분이 파손됐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도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승객 700여명은 김천 구미역에서 다른 KTX로 갈아탔습니다.
그동안 수년째 아찔한 사고가 반복됐습니다. 레일킬 때문에 대형참사가 일어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사실 KTX가 개통한 2004년부터 ‘레일킬’ 사고에 대한 우려가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덩치 큰 멧돼지가 선로 위에 깔리면서 달리던 열차의 바퀴가 탈선한다면 아찔한 상황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수서고속철도(SRT) 개통을 앞두고 시험운행에 나선 수서고속열차가 경기도 평택시 지제역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2012. 12.7 사진= 연합뉴스
때문에 코레일은 개통 초기에 KTX 선로 전 구간에 동물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한 안전펜스를 설치했습니다. SRT 역시 대부분의 선로를 KTX와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코레일 관계자는 “안전 펜스의 높이가 2.5m 이상 됩니다. 야생동물이 넘어올 수 있는 높이가 아닙니다. 고라니나 노루가 일정 높이 이상 뛸 수 있는 것을 감안했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안전 사고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야생동물들이 선로에 뛰어드는 이유가 뭘까요?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하수구를 보통 막아놓는데 비가 오면 전부 쓸려 내려가는 바람에 ‘빈틈’이 생깁니다. 주기적으로 보수를 해줘야 하는데 KTX 선로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구멍이 생기면 보수하기 전에 문제가 생깁니다. 동물이 들어오는 틈이 되는 것입니다”라고 전했습니다.
다른 원인도 있습니다. 일선에 근무하는 철도노조 관계자는 “전 구간에 철조망이 있고 시설 관리자들이 오가는 출입문도 평소에 잠겨 있습니다. 동물이 이론상으로 넘어오지 못하지만 산 능선에 따라 울타리 실제 높이는 차이가 있어 점프력에 따라 넘어올 수 있습니다. 외부 공사 작업자들이 출입문을 열어둘 경우에도 동물이 침입할 수도 있습니다”고 우려를 드러냈습니다.
한국로드킬예방협회 관계자는 “산간지역 경사 구간엔 야생동물들이 펜스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경사지에서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뛰는 경우 유효 높이가 많이 줄어듭니다. 일단 선로로 뛰어들면 빠져나가기가 힘듭니다. 선로를 배회하다가 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고 밝혔습니다.
결국 경사면에 있는 안전 펜스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국토부 관계자도 “울타리가 있지만 비탈면에서 야생동물이 점프해서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고 덧붙였습니다.
이에 대해 코레일 측은 “산간지역에도 남김없이 펜스가 설치됐습니다. 야생동물이 넘어서 들어올 수 없습니다”라며 반박했습니다.
가는 해가 아쉬운 듯 전국적으로 많은 눈이 내린 가운데 30일 전남 함평군 월야면 연동마을의 한 토끼농가에서 새끼 토끼들이 하얀 눈밭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2010.12.30 사진= 연합뉴스
여기에 또 다른 원인도 있습니다. 야생동물들이 안전펜스 밑으로 ‘땅굴’을 판다는 점입니다. 앞서의 철도노조 관계자는 “철조망 밑으로 토끼와 너구리 등 야생동물이 파헤치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매년 수시로 점검해서 보강하거나 흙을 메우는 관리를 하는데 코레일에서 2016년 파업 때 울타리와 배수로 등을 관리했던 직원을 해고해 지금은 전혀 관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귀띔했습니다.
7일 강원 강릉시 경포호 인근에서 너구리 일가족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2010.6.7 사진= 연합뉴스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한국로드킬예방협회 관계자는 “빗물이 빠져나갈 수 있는 배수구를 촘촘히 막는 작업이 지금보다 더 자주 이뤄져야 합니다. 사고 예방을 위해서 경사지에 설치된 펜스의 높이를 높이고 꾸준히 빈틈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조언했습니다.
국토부 관계자도 “시설 관리를 담당하는 코레일이 매일 선로 상황에 대해 모니터링을 할 수 없습니다. 1년에 한 두 건 정도 야생동물이 열차에 부딪히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노선의 특성상 완벽한 차단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번 사고를 기점으로 안전펜스에 대한 전수조사를 시작했습니다”고 답했습니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큰 사고는 우연히 또는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반드시 경미한 사고들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법칙은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원인을 파악하고 잘못된 점을 시정하면 대형사고를 방지할 수 있지만 이를 무시하고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레일킬’ 열차 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고된’ 참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최선재 기자 s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