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 리그는 한동안 스타플레이어 기근에 시달렸다. 류현진(LA 다저스)이나 오승환(세인트루이스) 같은 특급 선수들이 해외 리그로 떠난 뒤에는 더 심해졌다. 리그 지형을 뒤흔들 만한 ‘천재형’ 스타 선수들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주목할 만한 새 얼굴조차 거의 등장하지 않는 현실이 수년간 이어졌다. 신인왕은 대부분 ‘중고 신인’들의 차지였고, 신인 선수가 1군에서 자리를 잡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야구계는 이에 대해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이후 수많은 체육 인재들이 다 야구가 아닌 축구로 몰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올해와 내년은 다르다. 10개 구단이 잔뜩 기대에 부풀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승 금메달과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신화를 목격하고 야구를 시작한 ‘베이징 키즈’들이 신인 드래프트에 쏟아지기 때문이다. 특히 투수 쪽이 풍년이다. 프로 각 구단 스카우트들이 “21세기 최고의 드래프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뛰어난 투수들이 한 해에 다 몰린 적이 있었나 싶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제28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 대회에 참가 중인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 사진=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 시속 150㎞대 강속구 투수가 수두룩
실체 없는 기대감이 아니다. 올해 고교를 졸업하는 투수들 가운데 시속 150㎞대 강속구를 뿌리는 인재가 전국에 10명이 넘는다. 시속 140㎞대 후반의 직구를 던지는 투수를 한 해에 한두 명도 찾아보기 어렵던 시절은 이제 지났다. 다른 투수들도 이전 3학년 투수들보다 평균 4~5㎞ 정도 구속이 늘었다는 게 중론이다. 특히 서울권 고교와 오른손 정통파 투수 가운데 특급 유망주들이 많이 몰려 있다.
최근 초대 국가대표 전임 사령탑으로 부임한 선동열 감독까지 이미 프로도 아닌 ‘고교 야구’ 선수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취임 기자회견에서 “고교 졸업을 앞둔 투수들 가운데 좋은 선수들이 꽤 있다고 들었다. 아마 야구 경기도 유심히 지켜보면서 후보를 찾을 생각이다. 그 선수들이 프로에 와서 잘 성장해 줬으면 좋겠다”고 바라기도 했다. 선 감독과 한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3년 뒤 열리는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최상의 전력을 구축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올해 고교를 졸업하는 투수들이 프로 입단 3년 차가 되는 해다. 류현진과 김광현(SK)이 입단 2~3년차부터 국가대표 원투 펀치로 활약했듯, 올해 졸업 예정자들에게도 그 못지않은 기대를 걸고 있다는 의미다. 한국 국가대표팀이 한동안 오른손 선발 투수를 뽑는 데 애를 먹었기에 더 그렇다.
10개 구단이 각 연고 지역 유망주들 가운데 최고의 재목을 선발하는 1차 지명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드러난다. 1차 지명을 받은 선수 10명 가운데 야수는 단 2명뿐. 또 투수 8명 가운데서도 한양대 최채흥(삼성)을 제외한 7명은 모두 즉시 전력으로 평가받는 오른손 정통파 투수들이다. 휘문고 안우진(넥센), 배명고 곽빈(두산), 유신고 김민(kt), 마산고 김시훈(NC), 선린인터넷고 김영준(LG), 동산고 김정우(SK), 북일고 성시헌(한화) 등이 일찌감치 연고 구단으로부터 미래의 에이스로 낙점됐다.
특히 서울 세 팀 가운데 올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넥센은 전 구단이 예상한 대로 ‘베이징 키즈’ 최대어로 꼽힌 안우진을 데려갔다.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투수”라는 극찬을 받아온 안우진은 193㎝의 큰 키에 최고 156㎞ 강속구를 뿌리는 대형 유망주다. 게다가 넥센에는 안우진의 휘문고 1년 선배인 이정후가 있다. 이정후는 지난해 1차 지명을 받고 올해 입단해 역대 신인 타자 최다 안타 기록을 갈아치웠다. 신인왕은 떼어 놓은 당상이다. 넥센으로선 2년 연속 최고의 신인을 지명했다는 기대에 부풀 수밖에 없다.
두산이 1차 지명한 곽빈. 사진=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서울 지역에서 2순위로 지명한 두산 역시 안우진과 자웅을 겨루는 대형 투수 곽빈을 뽑았다. 안우진과 곽빈 그리고 kt 1차 지명을 받은 김민까지 세 명은 직구 시속이 150㎞를 웃도는 투수들이다. 또 다른 1차 지명 투수인 김시훈, 김영준, 김정우, 성시헌도 이미 시속 140㎞ 중반대 직구를 던진다. 프로에 와서 구속이 더 빨라질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수준급 변화구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제구가 좋지 않다는 해묵은 편견도 통하지 않는다. 안우진을 포함한 일부 선수들은 이미 프로 못지않게 경기를 운영할 줄 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 1차 지명 능가하는 2차 지명 후보들
1차 지명을 받을 수 있는 선수의 숫자는 매년 한정돼 있다. 서울 지역은 총 3명, 나머지 지역은 각 1명이 전부다. 따라서 올해와 같은 ‘초대박’ 신인 드래프트 시장에서는 1차 지명을 받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도 2차 지명에 나온 특급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지난해 최하위에 그치면서 1라운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보유하게 된 kt가 행복한 고민을 거듭해야 했을 정도다. 드래프트에 나오는 선수들 역시 1라운드와 2라운드 지명 순위를 놓고 벌써부터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다.
당장 덕수고 양창섭과 경기고 박신지, 장충고 성동현은 서울 3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LG가 마지막까지 1차 지명 후보에 놓고 고민했던 투수들이다. 당연히 모두 2차 지명회의에 등장한다. 특히 양창섭은 직구 구속이 시속 150㎞를 넘지 못하는 대신 변화구 구사 능력이 전국 최고로 꼽힌다. 슬라이더는 이미 프로에서도 통할 수준이라는 분석이 많다. 제구가 좋아 볼넷도 거의 없다. 10이닝 당 한 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구속이 느린 것도 아니다. 직구 시속이 140㎞대 중반에 형성된다. 세광고 김유신은 언제나 지명 1순위인 ‘왼손 파이어 볼러’다. 고교 2학년 때부터 140㎞대 후반 빠른 공을 던졌다. 7월 열린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2회전에선 5이닝 동안 아웃카운트 14개를 삼진으로 잡아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컨디션 관리를 위해 일찍 내려가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많은 삼진을 추가했을지 알 수 없다.
2차 지명 최대어로 손꼽히는 서울고 강백호. 사진=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무엇보다 아예 1차 지명을 받을 수 없었던 선수들 가운데 또 다른 ‘최대어’가 숨어 있다. 서울고 강백호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경기 부천중에서 서울 이수중으로 전학한 탓에 1차 지명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나 일본의 ‘괴물’ 오타니 쇼헤이를 연상시킬 만큼 투타에서 모두 특급 재능을 과시하고 있다. 마운드 위에서는 마무리 투수로 나와 시속 150㎞ 안팎의 돌직구를 뿌리고, 타석에서는 나무 배트로 고교 3년간 공식 경기에서 두 자릿수 홈런을 뻥뻥 쳤다. 우투좌타로 1학년 때부터 투수, 포수, 1루수를 오가며 활약했다. 2015년 고척스카이돔 개장 첫 홈런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마산 용마고 오른손 투수 이승헌도 고교 진학 후 1년을 유급한 경력 탓에 연고구단 NC의 1차 지명 대상자에서 제외됐다. 나머지 9개 구단들에게는 행운이었던 셈이다. 195㎝의 큰 키로 역시 시속 150㎞를 넘나드는 빠른 공을 던진다. 슬라이더도 수준급이다. 올해 전국대회에서 무패 행진을 펼쳤고, 1점 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 한국 야구 르네상스 열릴까
전국의 리틀 야구팀 숫자는 2007년 20개를 간신히 넘겼다. 그러나 2009년에는 70여 개로 늘어났다. 올림픽 금메달과 WBC 준우승이 한국 야구의 미래에 디딤돌을 놓은 것이다. 그때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유망주들은 서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실력이 쑥쑥 늘었다. 올해 신인 지명회의에 나오는 선수들이 그 르네상스를 증명하는 결과물들이다.
2차 지명 최대어 가운데 한 명인 덕수고 양창섭. 사진=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
어쨌든 내년 시즌 프로에 데뷔하게 될 새 얼굴들은 벌써부터 야구계 전체의 큰 기대를 받고 있다. 실제로 현재 고교 3학년 가운데는 1학년 때부터 이미 주전으로 활약하고 2학년 때 모교의 간판으로 자리 잡은 선수들이 많다.
청소년 국가대표팀을 뽑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청소년 대표팀은 매년 거의 전원이 고3 학생들로 이뤄진다. 성장기 선수들이라 체격과 실력 모두 나이 1년에 따른 격차가 크기 때문이다. 일례로 2005년 청소년 대표팀은 단 한 명만 빼고 전원이 3학년생으로 구성됐다. 유일한 2학년생은 안산공고에서 무적의 좌완 에이스로 이름을 날리던 김광현뿐이었다. 김광현은 고교 3년 내내 홈런을 단 하나도 맞지 않은 투수로 유명했다. 2학년 선수가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서는 그 정도 실력이 필요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난해 청소년 야구대표팀에는 2학년 학생이 4명이나 포함됐다. 성남고 투수 하준영, 덕수고 투수 양창섭, 세광고 포수 김형준, 서울고 내야수 강백호였다. 마지막 순간 아깝게 기회를 놓친 2학년생은 더 많았다. ‘베이징 키즈’는 이렇게 양적, 질적으로 모두 풍부하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역대 황금세대는? 박찬호·정민철의 92학번 ‘베스트 오브 베스트’ 한국 야구사에는 이른바 ‘황금 세대’들이 존재해왔다. 같은 해에 고교를 졸업한 선수들이 불꽃 튀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야구계 판도를 뒤흔드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뛰어난 동기생은 다른 선수들을 분발하게 하는 좋은 자극제다. 최동원, 김시진, 이만수, 김성한이 포진한 ‘77학번’은 프로야구 황금 세대의 출발 지점이다. 선동열, 이순철, 정삼흠 등이 주축을 이루는 ‘81학번’도 선배들 못지않게 화려했다. 그러나 많은 야구 전문가들과 야구팬들이 최고로 꼽는 황금 세대는 다름 아닌 ‘92학번’이다. 1992년에 대학에 진학하거나 프로에 발을 디딘 선수들 가운데는 유독 천부적인 재능과 숙련된 기량을 뽐내는 초특급 재목들이 많았다. 휘문고 임선동, 신일고 조성민, 경기고 손경수, 공주고 박찬호 홍원기, 광주일고 박재홍 김종국, 부산고 염종석, 대전고 정민철, 경남상고 차명주, 동산고 송지만이 바로 1973년생들로 이뤄진 황금의 92학번들이다. 정민철은 1972년에 태어났지만 고교 시절 1년을 쉬어 92학번과 동기가 됐다. 이들 가운데 서울 지역 고교를 다닌 임선동, 조성민, 손경수는 잠실 라이벌 LG와 OB(현 두산) 사이에 역대 가장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을 불러일으킨 ‘빅 3’였다. 그러나 정작 가장 성공한 선수는 이 불꽃 경쟁에서 한 발 떨어져 있던 박찬호였다. 한양대 재학 도중 미국으로 날아가 LA 다저스에 입단했고,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이자 아시아 출신 최다승(124승)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코리안 특급’이라는 단어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92학번들보다 딱 2년 늦게 태어난 ‘94학번’들도 선배들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다. 신일고 김재현 조인성, 부산고 주형광, 충암고 신윤호, 광주일고 이호준, 성남고 김경태, 군산상고 신경현, 경남고 손인호, 경남상고 채종국 등이 고교 시절부터 명성을 날린 대표주자들이다. 1975년에 태어난 선수들이 주축이지만, 배명고 김동주는 1976년 2월생으로 1년 먼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해 94학번들과 묶였다. 이들 중엔 좌우 거포인 김재현과 김동주가 최고의 라이벌로 여겨졌다. 둘은 소속팀도 잠실 라이벌인 LG와 두산으로 갈라졌다. 김재현은 고교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하면서 역대 고졸 신인 최고액을 경신했다. 입단 첫해부터 서용빈, 유지현과 ‘신인 3총사’로 불리면서 고졸 신인 최초로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김동주는 고려대 진학 후 1998년 OB에 입단하면서 역대 야수 최고 계약금을 받았다. 두산 부동의 4번타자로 활약했다. 이후 세대들에게는 ‘학번’이라는 단어를 붙이기가 어렵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곧바로 프로에 뛰어드는 선수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1982년에 태어난 ‘01학번’들도 대부분 그렇다. 부산고 추신수 정근우, 경남고 이대호, 북일고 김태균, 경기고 오승환, 대구고 손승락, 부산상고 채태인, 경북고 김강민 등이 포함된다. 특히 추신수, 정근우, 이대호, 김태균은 2000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합작한 멤버다. 이들은 실력과 몸값 모두 92학번 이후 최고의 ‘골든 에이지’로 꼽힌다. 한국은 물론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최상급 리그에서도 가리지 않고 활약했다. 그 후에는 ‘06학번’과 ‘07학번’이 맥을 이었다. 1987년생 선수들이 주축인 06학번은 화려한 이름들로 가득 찼다.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동산고 류현진, 광주일고 강정호, 신일고 김현수, 경기고 황재균을 필두로 군산상고 차우찬, 진흥고 양의지, 인천고 이재원, 덕수고 민병헌 등이 이름을 드높이고 있다. 역대 가장 많은 메이저리거를 배출한 학번이다. 이들보다 1년 후배인 07학번도 훌륭하다. 01학번과 마찬가지로 2006년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함께 일군 멤버들이 많다. 안산공고 김광현과 동성고 양현종이 왼손 에이스 쌍두마차를 이룬 가운데 부산고 손아섭, 화순고 김선빈, 인천고 김재환 등도 갈수록 주가가 치솟고 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