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 12시 51분쯤 마광수 전 교수가 서울 용산구 이촌동 한 빌라 베란다에서 숨졌다. 마 전 교수의 이복 누나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했다. 그의 장례는 근처 순천향대 병원에서 치러졌다. 7일 발인이 진행됐다. 화장된 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분당추모공원 휴에 안치됐다.
마광수 전 교수 영정. 연합뉴스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마광수 전 교수가 남겼던 인터뷰와 유서, 주변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극단적 선택이었다. 그가 살던 빌라 경비원은 “최근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밥도 거의 안 먹은 걸로 안다. 부쩍 수척해졌다”고 했다. 경찰에 따르면 우울증 증세가 심했다.
마광수 전 교수는 물리적, 정신적으로 한국 사회의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교수 사회에서도 왕따였다. 해직 이력으로 명예교수 직함을 달지 못했다. 전과 2범으로 사립학교 교직원 연금법에 따라 퇴직급여 및 퇴직수당 일부를 감액당했다.
마광수 전 교수는 지난 1991년 8월 25일 <즐거운 사라>를 발표한 뒤 외설 논란으로 1992년 10월 29일 강의 도중 구속됐다. 1992년 12월 28일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석방됐다. 이듬해 2월 28일 교수 직위가 해제됐고 1995년 6월 16일 대법원은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확정했다. 다음날 교수직에서 해직됐다가 1998년 3월 13일 특별사면을 받았다. 1998년 5월1일 연세대 교수로 복직했다.
복직했지만 삶은 순탄치 않았다. 마광수 전 교수는 2000년 6월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논문 실적 등의 문제로 탈락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였다. 실제 동료 교수들의 집단 따돌림이 재임용 거부의 주된 이유라고 알려졌다. 이때 마 전 교수는 외상성 우울증으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했다. 2002년 복직했지만 우울증이 악화돼 다시 휴직했다. 2004년에야 건강을 회복해 강단에 다시 올랐다. 검찰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2006년 11월 24일 개인 홈페이지에 음란물을 게시한 혐의로 그를 불구속 입건시킨 뒤 이듬해 4월 10일 약식기소했다. 그는 20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
지난해 교단을 떠나며 마광수 전 교수는 그간 쌓였던 한을 내비쳤다. 그는 “학교에서 잘리고 겨우 복직했더니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으로 우울증을 얻어 휴직했다. 줄곧 국문과의 왕따 교수로 지냈다”며 학교 생활을 말했다. “문단에서도 왕따였다. 책도 안 읽어보고 무조건 나를 변태로 매도하는 대중들 때문에 내 육체는 울화병으로 허물어졌다”며 “인생이 너무 억울하고 한스럽다. 몹시 아프다. 나는 점점 더 늙어갈 거고 병도 많아져 몸은 더 쇠약해갈 거다. 논 기간이 길어 아주 적은 연금 몇 푼 갖고 살려면 생활고도 찾아올 거다. 하늘이 원망스럽다”고 퇴임 소감을 밝힌 바 있었다.
내·외적으로 고통을 호소했던 마광수 전 교수는 홀로 외로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그가 가는 길을 정갈하게 수놓았다. 한 제자는 “소설 <즐거운 사라> 속에는 어떠한 범죄도 없었다. 실제 있었던 일이었더라도 누구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소설을 쓴 작가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게 모순”이라고 했다.
이어 “마 전 교수는 수업 때마다 학생들에게 ‘내가 담배 한 대 피울게요’라고 말한 뒤 담배를 피웠다. 학생들에게도 피우고 싶은 사람은 피워도 된다고 했다”며 “지나다가 학생이 인사를 하면 잘 모르는 학생한테도 90도로 허리를 숙여 답례를 했다”고 그의 수평적이었던 모습을 추억했다.
연세춘추에서 마광수 전 교수를 인터뷰했던 또 다른 제자 역시 긴 소회를 남겼다. 그는 “마 전 교수가 의도한 건 ‘인간은 누구나 욕망이 있는데 욕망을 계속 외면하면 욕망이 응축되어 잘못된 방향으로 분출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내게는 프로이트가 ‘꿈은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욕망을 실현시켜 인간이 욕망을 실제로 일을 벌이거나 미쳐버리는 것에서 막아준다’고 분석한 것과 비슷한 개념으로 들렸다”며 “마광수 교수는 변태적인 성욕이나 성행위를 옹호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문학이 그 어떤 매체보다 안전한 형태의 분출이니 해소하자는 건전한 주장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학보사 기자 시절 마광수 전 교수를 인터뷰했던 일화도 내놨다. 그는 “<가자 장미여관으로> 팻말이 붙어있던 그의 연구실은 책장 하나 없이 사방이 흰 벽이었다. 방에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긴 손톱에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른 손 모형이 있었다. 마 전 교수 책상 옆 벽에는 야한 여성 사진이 도배돼 있었다”며 마 전 교수의 연구실을 기억해 냈다.
이어 “그 요상한 풍경 한가운데 앉아 ‘장미’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마 전 교수는 나를 맞았다. 내 작품은 포르노가 아니라며 수업처럼 억울함을 토로하는 그는 인터뷰 내내 줄담배를 피웠다. ‘교수님 담배 조금만 줄이셔요. 학생들이 교수님 이렇게 좋아하는데 오래오래 건강하셔야죠’라고 하자 평소 잘 웃지 않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며 “그는 분명한 의도가 있는 천박함을 글로 썼다. 꽉 막힌 한국 사회에 문학으로 질문을 던졌다. 스스로의 삶을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전했다.
신상목 작가도 동참했다. 그는 “대학생 때 있었던 일이다. 정문 앞을 통과하려는 택시를 경비가 막아 섰다. 당시 택시는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광수 전 교수는 택시를 한두 번 탄 것도 아니었다. 그는 택시가 강의실 앞까지 갈 수 있다는 걸 분명히 알았다”며 “하지만 그는 몇 번 이야기해 보더니 그래도 안 된다는 경비의 말에 그냥 택시에서 내렸다. 수업에 늦었는지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몸으로 허겁지겁 언덕을 향해 달렸다. 그는 걷는 모습만으로도 보는 사람이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허약했다”고 마 전 교수의 일화를 털어놨다.
이어 “다른 교수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거다. 교수가 탄 차를 막아 섰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광수 전 교수는 그냥 내렸다. 스스로 뛰어갔다”며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마 전 교수는 자유를 사랑하되 투쟁을 원한 사람이 아니었다.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뒤 마 전 교수의 삶에 닥친 시련은 그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