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한국당) 지도부에 앉아 있는 한 현역 의원의 ‘각오(?)’다. 지난 9월 4일부터 한국당이 거리로 나왔다. 국회의원들은 정기국회가 열리는 지금이 이른바 ‘대목’이다. 그런데 한국당은 가장 바쁜 시기인 9월 정기국회를 전면 보이콧했다.
한국당은 김장겸 MBC 사장 체포영장 발부에 반발, 문재인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를 저지하겠다며 장외로 나섰다. 언론장악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것인 만큼 문재인정부의 버르장머리를 이번 기회에 단단히 고쳐놓겠다는 것이 한국당의 목표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가 9일 오후 서울 코엑스몰 앞에서 열린 ‘5천만 핵 인질, 공영방송 장악’ 국민보고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간판은 이렇게 내걸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번 보이콧이 야당으로서의 야성(野性)을 키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이번 장외 투쟁은 명분이 약하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당내에서도 적잖은 의원들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투쟁의 강도를 높일수록 여론의 지지는 더 떨어지는 ‘투쟁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은 겉으로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한국당의 ‘딜레마’를 알고 있기에 “곧 등원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낙관적 예측을 내놓고 있다. 일단 이번 보이콧이 한국당의 약점을 더 크게 보여줬고 결국, 여당에는 크게 불리할 게 없다는 반응을 민주당 쪽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 강한 야당으로의 전환점?
한국당 의원들이 거리로 나온 것은 12년 만이다. 2005년 12월 한나라당 시절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투쟁 이후 140개월 만에 장외 투쟁에 나섰다.
2005년 당시 한나라당은 개방형 이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사학법 개정 강행 처리에 반발, 국회 의사일정을 전면 보이콧하고 거리에서 연일 규탄집회를 열며 사학법 개정 원천 무효를 촉구했다.
한국당이 MBC 사장의 체포영장을 문제 삼으며 장외로 대결 무대를 옮겨놓은 것은 정부의 언론 장악 시도를 반드시 저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대의명분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당으로서의 선명성과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기 위한 의도가 더 짙게 깔려있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등 다른 야당이 하고 있는 원내 대여 투쟁 방식과 다른 방식을 보이겠다는 것이다. 결국 보이콧 카드와 장외투쟁 방식이라는 ‘험한 길’을 선택, 문재인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야당은 한국당뿐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 한국당의 속내로 분석된다.
사실 한국당은 정기국회, 즉 원내에서 강공 드라이브를 할 수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가을 정기국회, 즉 대정부질문과 국정감사가 이뤄지는 9월 정기국회는 야당의 ‘힘’이 먹히는 시기다. 정부·여당의 잘못을 따져 묻고 국민들에게 이를 고스란히 비춰주는 기회다.
하지만 이번 정기국회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사태로 촉발된 ‘기울어진 운동장’의 연속이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재판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 야당인 한국당이 정기국회 기간 동안 오히려 여당의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도 크다. 여당인 민주당과 다른 진보 야당도 직전 보수 정권이 잘못한 점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집중적으로 파고들겠다는 각오도 다지고 있다.
어쨌든 한국당은 이번 장외 투쟁을 내부 결속을 다지는 동시에 여당의 공세를 사전차단하거나 희석시키는 용도로도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다중포석이다.
# 뿌리치기 힘든 투쟁 딜레마
한국당이 문재인 정부의 ‘방송 장악 기도’를 저지하겠다며 정기국회 의사일정을 전면 보이콧하는 등 대여투쟁에 나서고 있지만, 당 내부에서조차 “이거 맞아?”라는 의문부호를 쏟아내고 있다. 내부 시선조차 싸늘하다는 것이다.
“MBC 김장겸 사장이 과연 뚜렷한 명분이냐”라고 되묻는 당내의 목소리는 “싸움을 하느라 피로감만 쌓일 뿐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른바 ‘투쟁 딜레마’에 빠지고 있다”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상당수 한국당 당직자와 보좌관들 사이에서는 “당 지도부를 말리고 싶은 차원을 넘어서 자괴감이 든다”는 말까지 가감 없이 하고 있다.
북한 6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안보 위기와 국민 불안감이 높아진 이때 부당노동행위 혐의로 법적 절차에 따른 체포영장 발부를 빌미로 장외투쟁이란 수단을 동원해 국회를 파행으로 몰고 가는 것은 누가 봐도 ‘명분없는 싸움’이라는 의견을 제기하는 당내 목소리는 의외로 강하다. 당 지도부가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으로 부담을 떠안게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당 지지기반인 대구경북(TK) 최대 일간지인 매일신문 취재에 응한 대구경북 한 보좌진은 “2005년 사립학교법 개정 반대 투쟁 때와 정치 상황이 판이하다. 그때는 30~40% 지지를 받았지만, 현재는 국민이 공감하기 어려운 프레임을 들고 나와 대중들로부터 더 멀어지는 모양새”라고 말했다. 이어 “원내대표가 ‘돌격 앞으로’를 외치고 일부 분기탱천한 의원이 전의를 불사르고 있는 상황에서 보좌진이 이를 말리기도 여의치 않고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보좌진은 “검찰총장을 만나겠다고 국회의원 80명이 몰려간 것은 스스로 품격을 떨어뜨린 일이다. 대여투쟁은 원내에서 상임위나 대정부 질문 등 민주적 수단을 통해 이뤄져야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데, 당 지도부가 이렇듯 조급하게 무리수를 두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역의원도 “당 지도부가 명분 없는 싸움을 시작했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야당이 된 지금 당 지도부가 방향을 정했는데 동참하지 않고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라고 곤혹스러워했다.
# 출구전략 찾나 안찾나?
당내에서조차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자 지도부 내에서도 보이콧을 철회할 명분을 찾는 등 ‘출구전략’이 거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정부질문과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등 주요 국회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는데 무작정 장외 투쟁만 계속해서는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
국회 복귀를 두고 당 지도부에서는 일단 시각이 엇갈리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당 투톱인 홍준표 대표와 정우택 원내대표도 생각이 다소 다른 것으로 읽힌다. 국회 복귀를 놓고 갈등 양상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정우택 원내대표는 9월 6일 국회에서 기자들을 만나 국회 복귀의 전제 조건을 얘기했다. 조건이 충족되면 언제든지 국회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노영(勞營) 방송으로 가지 않겠다. 언론장악을 시도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사표시가 있어야 한다”며 “이것을 재천명하고 이행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국회 복귀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 원내대표는 이어 “정부가 국정운영 방식과 관련해 동반자의 입장에서 야당의 말에 귀 기울이고, 독주·독선에서 벗어나서 협치의 정신을 지키겠다고 천명하면 국회가 정상화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상 국회 정상화의 조건을 내건 것으로 한국당이 지난 9월 2일 정기국회 보이콧을 선언한 이후 한국당 지도부는 처음으로 구체적 복귀 조건을 이날 언급했다. 정 원내대표의 발언 이후 “한국당이 슬슬 출구전략을 모색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 원내대표는 “정부·여당이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은 제시해야 (보이콧을) 풀 수 있는 논의를 할 것이 아니냐. 정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협상과 타협이기 때문에 최소한 이 두 가지가 이뤄져야 대화를 하고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돌아올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 대표의 생각은 달라 보인다. 지난 9월 2일 정기국회 전면 보이콧을 결정한 이후 대여 강경투쟁을 주도하고 있는 홍 대표는 지난 9월 6일 의원총회장에서 “장외투쟁을 하는 것은 야성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 4년 반 동안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단련을 해야 하는 그런 시점”이라고 밝혔다.
홍 대표는 지난 9월 5일 의총에서도 “일각에서 원내투쟁이 옳지 않냐고 하는데 원내투쟁을 한들 들러리가 된다”며 “가열차게 방송장악과 대북정책 수정 등 두 가지를 목표로 장외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말했다. 출구 전략 모색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정 원내대표와 다른 의견을 나타낸 것이다.
# 느긋한 여당
민주당은 “안보와 민생을 내팽개친 것”이라며 즉각 국회에 복귀해야 한다고 압박을 이어가고 있지만 ”여론은 우리 편“이라는 것을 감지한 듯 다소 느긋한 분위기다. 국민들에게 상대적으로 체감도가 많이 떨어지는 MBC 사장 문제를 가지고 정기국회를 파행시키는 한국당의 행동에 대해 대다수 국민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분위기를 간파한 것으로 분석된다.
민주당은 한국당의 이번 보이콧을 초당적 협력이 필요한 시점에 정쟁을 벌이는 것이라고 규정, 명분이 약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일단 이 전략은 먹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당 내부에서조차 ”명분 약한 싸움“이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한국당의 보이콧 동력이 계속 이어지기 힘들다는 분석도 하고 있다. 곧 국회 정상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확증 섞인 기대도 하고 있다.
일단 민주당은 한국당에 대해 공세를 펴면서 ‘한국당 비판 여론’을 다잡고 있다. 민주당은 한국당이 정우택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연설을 취소하고 국민의당 김동철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연설을 위한 본회의에도 불참하자 ”국민에 대한 의무를 팽개쳤다. 국회에 대한 사보타지(고의적인 사유재산 파괴나 태업 등을 통한 노동자의 쟁의행위)다. 교섭단체 연설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는 아이들 장난이 아니다. (이런) 정당이 4개월 전까지 집권여당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원색적 비난을 쏟아냈다.
민주당 한 현역 의원은 “여당 입장이 아니라 국회의원 개인의 입장을 봤을 때 한국당의 이번 보이콧이 국민적 지지를 안고 가지 못하고 있다. 한국당은 계속 이어가겠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지금 밖에 나가보라. 먹고 살기 힘들다고 서민들이 아우성인 상황에서 방송사 사장 한 명 때문에 국회를 세워놓았다는 말을 과연 몇 명의 국민들이 받아들이겠느냐? 국회 복귀는 시간 문제이고 늦게 들어오면 있는 점수도 다 까먹을 것”이라고 했다.
한편 리얼미터가 tbs교통방송의 의뢰로 9월 4∼6일 전국 성인 남녀 1528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신뢰 수준 95%, 오차범위 ±2.5%포인트), 여당인 민주당의 지지율은 50.7%(직전 조사 때보다 0.6%p↓), 한국당 지지율은 15.5%(0.9%p↓)를 기록했다. 북핵 위기가 터지면서 진보 정당에 대한 불안감이 적지 않고 “민주당은 안보 무능”이라며 한국당이 보수층의 안방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고 있지만 보수정당 한국당의 지지율은 민주당의 지지율보다 더 떨어졌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 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