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검찰은 삼성 등 대기업이 전경련의 요청을 받고 총 68억 원의 자금을 제공했으며, 제공된 자금의 정확한 용처에 대해선 알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당시 전경련의 대외업무를 총괄한 이승철 전 전경련 부회장은 청와대 정무수석실로부터 ‘우파 지원’에 대한 지침을 하달 받고 이를 이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대기업과 전경련 모두 청와대의 압력에 못 이겨 거액을 상납하고, 우파 단체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고성준 기자
박근혜 정부 들어 보수단체를 동원한 여론 조작 시도는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진화했다. 청와대가 극우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하 어버이연합)을 지원하고 관제데모를 부추긴 의혹은 빙산의 일각이다. 박영수 국정농단의혹사건수사특별검사팀(특검팀)에 따르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정부의 자금 지원이 끊긴 단체는 무려 30여 곳이다.
검찰은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의혹에 대해 특검팀에서 관련 자료를 넘겨받고, 사건을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에 배당해 수사를 벌여왔다. 화이트리스트 사건의 뿌리는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가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를 통해 어버이연합 등 보수단체에 총 68억 원을 지원하고, 그 대가로 관제데모를 일으켰다는 의혹이다.
당시 보수단체를 관리한 허현준 전 청와대 행정관과 정관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몸통’으로 지목되는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모두 직권남용 등 혐의로 기소가 유력한 상황이다. 이들과 공모한 의혹을 받는 추선희 어버이연합 사무총장도 기소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수사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담당 검사들이 매일 새벽 1~2시에 퇴근하는 등 증거 보강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계에 따르면 최근 검찰은 전경련의 요구로 자금을 지원한 김 아무개 전 삼성 미래전략실 전무를 소환해 조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임원 역시 소환 시기를 검토 중이며, SK와 LG는 서면조사 등의 방법으로 보수단체 지원 경위에 대해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4대 기업은 모두 검찰 조사 여부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현재까지 검찰은 삼성 등 대기업이 전경련의 요청을 받고 총 68억 원의 자금을 제공했으며, 이 자금의 정확한 용처에 대해선 알지 못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당시 전경련의 대외업무를 총괄한 이승철 전 전경련 부회장은 청와대 정무수석실로부터 ‘우파 지원’에 대한 지침을 받고 이를 이행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대기업과 전경련 모두 청와대의 압력에 못 이겨 거액을 상납하고, 우파 단체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전경련 사정에 밝은 재계 관계자는 “당시 어느 누가 BH(청와대)에서 돈을 달라는데 거절할 수 있겠느냐”라며 “청와대가 심할 때는 하루 수십 번씩 전화해서 모금 진행 상황 등을 묻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청와대는 교황 방한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슈가 생길 때마다 전경련에 연락해 친정부 시위에 협조할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인사들에 앞서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조사를 받은 자유총연맹 전직 임원도 청와대의 무리한 요구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내놨다. 김정문 전 자유총연맹 기획실장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의 (관제데모) 요청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 전 실장은 앞선 검찰 조사에서 ‘친정부 시위와 관련해 구체적인 지시를 내린 것은 박근혜 정부가 처음’이라고 진술한 바 있다. 다른 자유총연맹 전직 핵심 관계자도 “청와대가 우리 쪽에 어떤 어떤 집회에 나가달라고 요청하면 사안별로 협조한 것이 맞다”고 말했다. 자유총연맹은 관련법에 의거, 정부 지원을 받는 국내 최대 관변단체다.
표면적으로는 재계와 자유총연맹 모두 청와대의 일방적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취재 결과 이에 배치되는 정황도 있다. 어버이연합과 함께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퇴직경찰 모임인 경우회는 대기업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2014년 4~11월까지 ‘세월호 반대 집회’에 참여했다. 또 같은 기간 극우단체인 고엽제전우회는 ‘세월호 관련 업무 지시’를 통해 세월호 유가족을 공격하는 집회를 수십 차례 열고, 야당을 비난하는 내용의 광고를 게재한 것으로 나타났다. 검찰 관계자는 “해당 기업과 보수단체가 공범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자유총연맹은 또 회장 선출 과정에서 청와대가 선거에 개입해 특정 후보를 밀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당시 청와대가 관제데모에 미온적인 자유총연맹 회장 A 씨를 교체하기 위해 반대파에 선거 자금을 댔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제8회 자유총연맹 나라사랑 평화나눔 DMZ 국토대장정 완주식에서 참가자들이 북한 규탄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일요신문 DB
자유총연맹 전직 임원들이 청와대에 제출한 진정서와 자유총연맹 전직 핵심 관계자의 설명 등을 종합하면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정무수석실 핵심 관계자 B 씨는 자유총연맹 회장 A 씨에게 선거를 앞두고 “특수부가 주시하고 있다”며 정부 정책에 협조할 것을 압박했다. 정무수석실은 박근혜 정부 당시 관제데모 지시의 실질적인 컨트롤타워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A 씨가 이를 듣지 않자 반대파에 선거 자금 명목으로 1억 원을 지급하고, 그 자리에서 일부인 2000만 원을 돌려받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출처불명의 자금은 청와대 예산이 아닌 전경련 등 외부에서 조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 김경재 자유총연맹 총재는 “터무니없는 소설”이라며 “음해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당시 반대파에 자금을 지원한 인사 가운데는 공교롭게도 4대 기업 고문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총연맹에 대한 기업의 지원으로도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김 총재는 “개인간의 채권 채무 관계로 정산이 모두 끝났다”며 “청와대가 선거에 개입했다거나 자유총연맹이 청와대 지시로 시위에 동원됐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현재 검찰은 화이트리스트 수사와 함께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에서 사건을 받아 이명박 정부 시절 있었던 댓글 조작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TF가 밝힌 ‘국정원 민간인 댓글팀’에는 대기업 간부가 포함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향후 계좌 추적 과정에서 대기업과 국정원 간 숨은 자금 거래가 드러나면 수사는 더욱 확대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검찰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 당시 민간 기업이 보수단체를 지원한 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대기업 관계자는 “화이트리스트 수사와 국정원 TF로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