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 심의위원 “위원 한 명이 보고 판단·결정 후 방송”
[일요신문] 친구를 만날 때, 직작 상사와 얘기를 나눌 때, 혹은 홀로 고독함을 즐기고 싶을 때 우리의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술.
술은 사람과 사이를 돈독하게 해주고 흥을 돋궈주는 역할도 하지만 때로는 온갖 사고를 일으키고 ‘흑역사’를 만드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과잉 섭취할 경우 건강에 해로운 것은 당연한 상식이며, 우리나라에서 발병률이 높은 심혈관계 질환 또한 알코올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부쩍 방송인들이 술을 마시는 장면이 아무렇지 않게 TV에 방송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어느덧 자연스러운 모습이 됐습니다. ‘따르고 마시고’ ‘원샷’ ‘소맥탕탕’, 그냥 이대로 둬도 괜찮은 걸까요?
가수 김건모는 방송에서 소주로 분수대와 정술기를 만드는 진풍경을 보여줬습니다. 사진= SBS <미운 오리새끼> 캡쳐
가수 김건모는 최근 SBS <미운 우리새끼>에서 자신의 ‘소주 사랑’을 과시하며 활약하고 있습니다. 소주병으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 정술기(소주 생수기), 소주 빙수, 소주 분수까지 선보이며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데, ‘김건모 혹시 소주 홍보대사가 아닐까’ ‘소주 업체로부터 스폰서를 받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매 방송마다 소주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먹방’의 진수를 보여주는 코미디TV <맛있는 녀석들>에서는 한 술 더 떠 출연자들이 ‘소맥 파도타기’를 보여줬습니다(128회). 물론 ‘회식’이라는 컨셉에 맞춰 꽁트를 하다보니 소주는 빠질 수 없는 소품이었겠지만, 이밖에도 치킨을 먹을 때(73회)도 자연스럽게 맥주가 등장했습니다.
사진= 코미디TV <맛있는 녀석들> 캡쳐
tvN <인생술집>은 출연자들이 아예 대놓고 술을 마시며 대화를 이어가는 컨셉의 프로그램입니다. 출연자들은 등장부터 소주 한 박스를 들고 출연을 하고, 소맥을 제조하며 “소주를 조금 더 넣어라” “이게 더 넣은 거야? 근데도 별로 안 쓰네”라며 대화를 주고 받습니다.
사진= tvN <인생술집> 캡쳐
언제부터 방송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자연스레 나왔을까요? 담배는 모자이크 하던데 술은 모자이크 안 하나요? ‘전체 관람가’로 연령 제한 없는 방송에서 이렇게 술을 마셔도 괜찮은 걸까요?
음주나 흡연 등 방송의 건전성에 대한 부분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통심의위’)가 심의합니다. 방통심의위는 방송법 제33조에 따라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을 제정·공표했습니다.
이 규정에 제28조(건전성)는 ‘방송은 음주, 흡연, 사행행위, 사치 및 낭비 등의 내용을 다룰 때에는 이를 미화하거나 조장하지 않도록 그 표현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음주나 흡연을 미화하고 조장하는 장면이 있으면 이를 심의하고 재제하는 것이 방통심의위가 할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사진=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중 일부 캡쳐
<일요신문i>는 방통심의위에 직접 문의했습니다. 그 결과, 지난 6월 이후 방통심의위의 위원 9명 가운데 9명 모두 공백이고, 지금까지 선임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심의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실제 방통심의위 홈페이지에서 확인해봤지만, 위원장, 부위원장, 상임위원 소개란에는 모두 ‘공석’이라는 메시지가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결국 6월 이후 선정적이고 유해한 내용의 방송이 방송된다 하더라도 이를 안건으로 상정해 심의를 할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그런 걸까요? 위원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참에 ‘소주 방송’을 그렇게 내보내는 걸까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위원 전원이 공석. 홈페이지 캡쳐
그렇다면 각 방송사들은 건전하고 유익한 방송을 위해 어떤 신중을 기하고 있을까요. 물론 앞서의 방통심의위와 별도로 각 방송사들은 내부에 자체적으로 심의위원회를 꾸리고 있으며 이곳에서 방송 등급에 따라 음란성, 폭력성, 유해 정도를 감안하고 프로그램의 심의를 거칩니다.
한 방송사 심의위원회 A 위원은 “음주 또는 흡연에 대한 심의를 합니다. 하지만 규정에서 말하는 ‘미화’와 ‘조장’은 매우 주관적인 기준이며, 보는 사람에 따라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무조건 문제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A 위원은 “그렇기 때문에 일률적인 잣대로 음주와 흡연을 금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생방송투데이>같은 교양 프로그램에 마을 이장님이 음식에 술을 곁들여 마시는 모습까지 다 삭제해야할까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술도 음식의 일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적절한 음주 방송은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술과 연관성 없는 방송인이 술을 소재로 지나치게 과한 연출을 하는 모습, 이렇게 전체관람가로 방송되도 괜찮은 걸까요.
공중파 방송의 ‘추석특선영화’ 등에 방영되는 영화들을 떠올려봅시다. 배우들이 피우는 담배에 모자이크가 되는 것을 본 경험이 다들 있습니다. 하지만 술은 모자이크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A 위원은 “통념적으로 금연 정서가 있으니 담배의 경우 모자이크를 하지만… (술은 그렇지 않다)”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술이나 담배나 둘 다 나쁘지만 담배가 더 나쁘니까 담배만 심의에 걸린다는 겁니다.
<tvN> 홍보팀 측에서도 <인생술집>에 대해 “당초 프로그램을 계획할 때는 방송 등급을 19세로 정해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CJ one때부터 시즌2로 재개편하며 젊은층을 타겟으로 하게 됐고, 이에 따라 15세 등급으로 하향조정 됐습니다”라며 “취한모습을 보여주고 음주를 미화시키는 등의 부분은 내보내지 않습니다. 연예인들의 편한 이야기를 보내주는 것이고, ‘음주가 적절한가’ 하는 문제도 지극히 주관적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오후 10시부터 오전 7시까지만 방송 광고가 가능한 주류 광고. 사진= 하이트 진로 캡쳐
결국 ‘주관적’이라는 애매모한 기준으로 ‘음주방송’이 버젓이 방영되고 있는 셈인데, 이같은 논리라면 누군가의 눈에는 ‘주류 광고’도 건전한 광고일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방송법은 ‘주류 방송광고 시간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주류 방송 광고는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할 수 없습니다.
앞서의 A 위원은 자사의 심의위원회 시스템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해당 요일에 제작물들의 심의가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심의는 한 명이 담당합니다.” 심의위원이 자신 만의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심의를 하고 방송 결정을 내린다고 합니다. 단 한 명이 자신만의 기준과 잣대로 판단하고 심의를 통과시킵니다. 그 심의위원이 매우 관대한 기준을 가졌다면, 그날 방송에선 연예인들의 폭음이 시작될 수도 있는 셈입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