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미어리그의 대표적 외국인 구단주들. 왼쪽부터 알 파예드, 글레이저, 러너, 아브라모비치, 탁신. | ||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은 근 몇 년간 부쩍 늘어난 외국인 구단주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러시아의 신흥재벌인 ‘올리가르히’부터 미국의 억만장자 사업가, 그리고 최근에는 태국의 전 총리까지 앞다퉈 프리미어리그 구단을 인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한편에서는 ‘축구 종가’의 자존심이 무너지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프리미어리그의 활성화를 가져왔다며 반기는 목소리도 있다.
현재 프리미어리그를 쥐락펴락하고 있는 외국인 출신의 구단주들을 한데 모아봤다.
현재 전체 프리미어리그의 20개 구단 가운데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는 구단의 수는 8개. 이는 프리미어리그의 40%가량이 외국 자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라별로 살펴보면 러시아 한 명, 미국 세 명, 프랑스 한 명, 이집트 한 명, 아이슬랜드 한 명, 태국 한 명 등이다.
외국의 억만장자 갑부들이 프리미어리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근래 들어서다. 외국인으로서 가장 먼저 프리미어리그 구단주가 된 사람은 최근 설기현이 이적한 풀럼의 구단주 모하메드 알 파예드(78)다. 이집트 출신의 사업가인 그가 풀럼을 인수하던 1997년 당시만 해도 외국인이 잉글랜드 축구팀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비록 그가 영국 최고의 고급 백화점인 ‘해러즈’를 소유하고 있고, 주된 활동무대가 영국이라고 해도 외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축구팬들은 적지 않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알 파예드는 3000만 파운드(약 550억 원)에 풀럼 구단을 인수했으며, 그후 효과적인 팀 운영으로 팀을 2부리그에서 프리미어리그로 올려 놓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지나치게 소극적인 구단 운영으로 팬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팀을 인수한 후 줄곧 적자를 기록하다가 마침내 ‘긴축 재정’에 들어갔던 까닭이다. 항간에서는 알 파예드의 관심사가 축구보다는 다른 데 쏠려 있기 때문이라는 비난도 쏟아졌다. 선수 영입보다는 죽은 아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데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은 지난 1997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다이애나비의 연인 도디 알 파예드였다. 그는 수년 간 영국 왕실의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아들의 죽음을 사고가 아닌 계획된 암살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억만장자 사업가들도 2000년대 들어서 부쩍 프리미어리그 시장에 군침을 흘리고 있다.
최초의 미국인 구단주는 2005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했던 미프로풋볼(NFL)의 ‘탬파베이 버커니어스’의 구단주이자 ‘스포츠 재벌’인 말콤 글레이저(79)다. 그는 구단을 인수할 때부터 지금까지도 줄곧 맨유 팬들의 환심을 사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전형적으로 돈만 아는 사업가이자 심지어 투기꾼이라는 불신 때문이다.
그가 7억 9000만 파운드(약 1조 5000억 원)라는 천문학적인 가격에 맨유를 인수했을 때부터 이미 그의 ‘본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 순수하게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어떻게 하면 수익을 남길까에 더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 EPA/연합뉴스 | ||
글레이저의 뒤를 이어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한 미국인은 미프로풋볼(NFL)의 ‘클리블랜드 브라운즈’ 구단주인 랜디 러너(45)다. 2006년 6260만 파운드(약 1120억 원)에 애스턴 빌라를 인수했는데 글레이저와 달리 애스턴 팬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심지어 그가 애스턴을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흥분한 팬들은 경기 중에 ‘U.S.A’라는 구호를 외쳤는가 하면 “오로지 랜디 러너 한 명뿐!”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애스턴 팬들이 이처럼 새 구단주를 두 팔 벌려 환영한 까닭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선수 영입과 구단 운영으로 팀을 바닥으로 내몰았던 더그 엘리스 전 구단주에게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미국 자본이 유입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팬들은 이로 인해 팀이 다시 활기를 띠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팬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러너는 팀을 인수한 후 지난 1년 동안 팀을 재건하고 정비하는 데에만 4000만 파운드(약 740억 원)를 쏟아 부었다.
팬들이 미국인 구단주를 반겼던 또 다른 이유는 소문난 그의 축구 사랑 때문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캠브리지의 클레어 칼리지에서 공부를 했던 그는 당시 잉글랜드 축구에 푹 빠져 지냈으며, 이미 그때부터 “장차 아스널, 풀럼, 애스턴 빌라 중 한 팀을 갖겠다”는 꿈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세 번째로 프리미어리그에 뛰어든 미국인 사업가는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의 ‘몬트리올 캐나디언스’ 구단주인 조지 질레트와 미프로야구(MLB)의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주인 톰 힉스 공동 회장이다.
이들은 올해 초 1억 7400만 파운드(약 3200억 원)에 리버풀을 인수했으며, 이번 시즌을 앞두고 선수 영입에만 4870만 파운드(약 900억 원)를 투자했다. 잉글랜드 축구팬들과 여론을 의식했는지 이들은 구단을 인수하면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리버풀을 인수한 것은 돈벌이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구단의 전통과 축구의 열정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외국인 구단주’라고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러시아의 석유 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41)다. 첼시 구단주로 더욱 유명해진 그는 추정 자산이 108억 파운드(약 20조 5000억 원)나 되는 러시아 최고의 갑부 중 한 명이다.
2003년 첼시를 5900만 파운드(약 1066억 원)에 인수했는데, 다른 구단들의 인수가격에 대부분 부채가 포함된 데 반해 첼시 인수가격엔 부채가 전혀 포함되지 않아 사실상 잉글랜드 축구 사상 전무후무한 가격인 셈. 그는 지체없이 4억 4000만 파운드(약 7950억 원)를 들여 세계 최고의 골잡이들을 ‘싹쓸이쇼핑’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FC 바르셀로나에서 뛰고 있는 호나우지뉴에게 프리미어리그 사상 최고의 연봉인 5800만 파운드(약 1100억 원)를 제시했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다.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는 거의 매 경기마다 관중석에 앉아 팀을 응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경기가 끝난 후에는 라커룸으로 찾아가 직접 선수들을 격려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팬들에게 스포츠를 사랑하는 구단주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제스처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러시아인으로는 포츠머스의 구단주인 알렉산더 게이다막(31)이 있다. 비록 국적은 프랑스이지만 러시아 태생인 그는 ‘제2의 첼시’를 꿈꾸면서 야심차게 팀을 꾸려나가고 있다. 지난해 초 팀을 인수한 그는 그후 숄 캠벨, 글렌 존스, 카누 등 유명 선수들을 차례로 영입했으며, 이로써 지난해 하위권을 맴돌던 팀을 돌풍의 핵으로 바꾸는 데 공헌했다.
웨스트햄의 브요르골프 구드문손 회장(66)은 아이슬랜드 출신의 사업가로서 2500만 파운드(약 460억 원)의 부채를 안고 있던 팀을 8500만 파운드(약 1535억 원)에 인수해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아이슬랜드의 ‘랜즈뱅키’ 은행의 회장인 그는 아이슬랜드 2위의 갑부다.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신참 구단주는 바로 태국의 전 총리인 탁신 치나왓(58)이다. 지난 7월 8160만 파운드(약 1500억 원)에 맨체스터 시티를 인수한 그는 총리 시절 저지른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후 영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비록 그의 돈에 대해 ‘검은 돈’ 혹은 ‘더러운 돈’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시즌 초반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팀의 성적을 본다면 이런 비난은 금세 수그러들 전망이다.
그는 꿈에도 그리던 프리미어리그 구단을 인수한 후 적극적인 경영으로 팀의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스벤 예란 에릭손 전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을 영입했는가 하면 약 670억 원의 거금을 들여서 롤란도, 비앙키 등의 선수들을 영입하기도 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