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동안 빌 헨리의 행세를 해왔던 가짜 헨리. | ||
얼마 전 미국에서는 ‘메이저리그판 신정아 사건’이라고 불릴 만한 황당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다. 한 남성이 20년 동안 가짜 메이저리그 투수 행세를 해온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다. 그것도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더욱 충격을 안겨주고 있는 상태. 얼마나 감쪽같았는지 아내와 가족들을 비롯해 주변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몇몇 메이저리그 선수들까지 완벽하게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을 정도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지난 9월 초 야구 역사가이자 열렬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인 데이비드 램버트는 AP뉴스를 통해 한 메이저리그 투수의 부음 소식을 접했다. 50~60년대 활동했던 전 메이저리그 좌완투수 빌 헨리가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부고 기사를 자세히 살피던 그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기사에는 ‘83세’라고 적혀 있었지만 그가 알고 있는 빌 헨리의 올해 나이는 분명히 ‘79세’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헨리는 텍사스주 출신에 정확한 생년월일은 1927년 10월 15일이 맞는데 기사 속의 헨리는 이상하게도 몬태나주 출신에 생년월일은 1924년 2월 1일로 기재되어 있었다.
평소 은퇴한 야구선수들의 인적 사항을 꿰고 있던 램버트는 의구심을 가진 채 헨리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남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뜻을 전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헨리 부인은 다소 황당하다는 듯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남편은 죽지 않았어요.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걸요.”
이에 뭔가 착오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즉시 AP에 전화를 걸어 기사를 수정해줄 것을 요청했고, 앞서 엉뚱한 부고 기사를 실었던 플로리다의 <더 레저>지는 즉각 진짜 헨리 부부에게 사과를 했다.
그렇다면 죽은 헨리는 누구인 걸까. 모든 사람들이 왕년의 메이저리그 투수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남자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놀랍게도 ‘가짜 빌 헨리’의 진짜 이름도 역시 ‘빌 헨리’였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클래런스 윌리엄 헨리 주니어’였지만 아내에게는 “원래 미들 네임이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윌리엄 헨리’라고 속여왔다.
플로리다 레이크랜드에서 세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와 살았던 그는 19년 동안 아내는 물론, 양딸과 주변 친구들에게 자신이 ‘메이저리그 투수 빌 헨리’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가 ‘가짜’였다는 소식에 오랜 세월 그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부인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녀는 “내가 지금까지 누구랑 살았던 건지 모르겠다. 남편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었다”며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진짜 헨리’와 ‘가짜 헨리’는 이름뿐만이 아니라 생김새마저 쌍둥이처럼 똑 닮아 있었다. 188㎝ 정도의 키에 체격도 비슷했으며, 둘 다 왼손잡이인 데다 사시란 점도 똑같았다. 사각턱인 얼굴형도 영락 없는 쌍둥이였다. 어찌나 닮았는지 오히려 양딸이 “두 사람의 현재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면 오히려 우리 아버지가 진짜 헨리 같다”고 말할 정도다.
▲ 진짜 빌 헨리 | ||
은퇴 후 즐겨 찾던 골프클럽에서 알게 된 세미프로 투수였던 봅 맥켄리 역시 그가 진짜 빌 헨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소 빌 헨리의 팬이기도 했던 맥켄리는 “헨리는 야구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40~60년대 활동했던 웬만한 야구선수들 이름을 줄줄 꿰고 있었다”면서 그가 가짜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맥켄리는 심지어 그를 자신이 부교수로 근무하던 플로리다 서던 칼리지에 야구 강사로 초빙하기도 했다. 이 강좌에서 헨리는 “요즘 메이저리거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지만 내가 선수였던 시절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내가 현역 시절 받았던 가장 많은 연봉은 1만 7000달러(약 1500만 원)가 고작이었다”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 역시 감쪽같이 속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생전에 얼마나 제대로 빌 헨리 행세를 했던지 아직도 그가 진짜 야구선수였다고 믿고 있는 사람도 있다. 브루스 브랜트라는 이름의 친구는 “그는 진짜 빌 헨리가 맞았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선수들이 스프링 캠프 훈련차 플로리다를 방문할 때마다 분명히 그와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을 보았다”면서 도무지 그가 가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의심스런 부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가지고 다니던 베이스볼 카드의 뒷면에 적힌 진짜 빌 헨리의 생년월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생년월일과 다르게 적힌 것을 보고 의아해 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프린트가 잘못된 것이다. 야구선수들은 때때로 스카우터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나이를 젊게 속이곤 한다”고 얼버무리곤 했다.
또한 베이스볼 카드 외에 이렇다 할 메이저리그 기념품, 가령 월드 시리즈 반지나 트로피, 현역 시절 사진 등이 없다는 점도 수상했다.
그럼에도 20여 년 동안 빌 헨리 행세를 해온 그는 결국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알리게 됐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이유에서 빌 헨리 행세를 하고 다녔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단지 그의 야구 실력은 동네 야구 수준에 불과했으며, 평생을 세일즈맨으로 일해왔다는 사실만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진짜 빌 헨리는 어떤 선수였을까. 그는 1952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로 메이저리그에 데뷔해 여러 팀을 거쳐 1969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에서 은퇴했다. 그의 통산 기록은 46승 90세이브, 방어율은 3.26이었다. 주로 구원투수로 활약했는데, 1960년 올스타에 선정됐고 1961년에는 신시내티 레즈 소속으로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를 끼었다.
현재 텍사스에서 멀쩡히 살아 있는 헨리는 가짜 소식을 듣고는 다소 놀라긴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았던 데 대해 박수를 보낸다”면서 웃어 넘겼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