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격한 법도에 답답함을 느껴 왕실과 자주 충돌했던 마사코 비(왼쪽)가 남편 마루히토 왕세자, 딸 아이코 공주와 함께 외출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이 책은 1990년대에 도쿄 특파원을 지낸 호주 저널리스트 벤 힐즈가 ‘왕실에 갇혀 사는’ 마사코 왕세자비의 고뇌를 그린 논픽션물. 이를 위해 힐즈는 마사코 비의 주변인 60여 명을 취재했다. 사실상 왕실의 치부를 드러낸 이 책에 대해 언론을 포함한 일본 사회는 저자의 사과를 요구하는 등 크게 반발하는 분위기. 심지어 저자의 메일에 살해위협까지 날아든 상태. 반면 저자는 “내 책은 진실만을 담고 있다. 사과할 이유가 없다”며 맞서고 있다.
이런 논란 때문인지 책은 날개 돋친 듯이 팔리고 있다. 한 서점 관계자에 따르면 “일주일 만에 서점에 들어온 책의 반 이상이 팔릴 정도”라고 말한다.
책은 “마사코 비가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 “이혼하면 왕세자는 재혼해서 남자 계승자를 얻을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시험관 왕이 등장할 수도 있다” 등과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로 도배돼 있다.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과연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을까.
이 책은 지난해 호주와 미국에서 먼저 출간됐다. 당시 일본 정부는 책 내용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고 힐즈와 출판사 측에 공식사과를 요구했다. 외무성은 항의문을 통해 왕족에 대한 “모욕적이며 무례한” 기술이 있다고 지적하며 그 배경에 “일본 멸시”가 있는 것이 아니냐며 이례적으로 강한 표현까지 사용했다.
이에 힐즈는 사과를 거부했고 “마사코 비를 괴롭힌 왕실이야말로 왕세자비에게 사과해야 한다”며 반박하기도 했다.
올해 3월 일본어판을 출판할 계획이었던 ‘고단샤’는 이런 소동이 불거지기 전부터 책 내용의 사실관계를 확인하며 100군데가 넘는 부분을 수정하는 등 출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러나 책 내용에 대한 사회적인 반발이 일고 힐즈가 사과를 거부하자 결국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다이산쇼칸’에서 ‘무수정 번역본’을 내면서 다시금 논란에 불이 붙은 것이다.
다이산쇼칸은 과거 적군파 멤버 기타가와 아키라 씨가 대표이사인 진보계열 출판사. <프린세스 마사코> 발매에 맞춰 중앙지를 비롯한 각 신문에 광고를 실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광고가 실린 신문은 극히 일부의 지방지뿐이었다.
다이산쇼칸의 기타가와 사장에 따르면 <아사히> <요미우리> <닛케이> 등 전국지들이 ‘왕실을 모욕하는 내용과 외무성과 궁내청이 싫어한다’는 이유를 들어 광고 게재를 거부했다고 한다. 어떤 부분이 왕실을 모욕했다는 것인지 서면으로 응답을 요구했지만 구체적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명한 왕실 저널리스트 가와하라 도시아키는 책에서 마사코 비에 대해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다” “주위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 한다” “이대로는 좋은 왕후가 될 수 없다”고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본인은 “책에 나온 말을 한 적도 없으며, 출판사나 저자로부터 일본어판이 나온다는 연락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마사코 비는 영재로 성격이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기질이 있지만 결혼하고 난 후 겸허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변했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이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다”고 분개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마쓰자키 도시야도 비슷한 경우다. 그는 책에서 만일 자신의 딸이 왕세자와 결혼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란 질문에 “딸을 말릴 것이다. 마음고생 때문에 병에 걸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마쓰자키는 “책에 나온 발언은 진짜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이 책이 출판된 배경에는 뭔가 정치적인 의도가 숨어있다”며 출판사 다이산쇼칸에 강하게 항의하고 있다.
“번역본을 출판한 것일 뿐”이라는 다이산쇼칸과 “사실 확인도 없이 출판한 것은 잘못”이라는 왕실 저널리스트들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것. 그 뒤에는 책 출간을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왕실이 자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궁내청과 외무성은 “책에 관한 정부의 입장은 이미 저자 및 호주의 출판사에 대한 항의를 통해 분명히 나타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일본어판에 대해 항의할 예정은 없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편 일본 언론들은 올 여름 많이 밝아진 모습을 보이며 공식석상에 조금씩 참석하던 마사코 비가 이번 소동을 계기로 다시 ‘잠수’를 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