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애니메이션 <스쿨데이즈> | ||
얼마 전 일본 교토의 911 교환원이 새벽에 한 여성으로부터 “남편이 스스로 목을 벴다”는 신고를 받았다. 현장으로 출동한 경찰은 2층 침실에서 목에서 피를 철철 흘린 채 사망한 동료 경관의 시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1층 부엌 바닥에서는 부인(41)과 전문대에 다니는 큰딸(19), 고등학생인 둘째딸(16)이 거의 넋이 나간 채로 앉아있었다. 둘째딸은 검은 원피스 차림에 상반신에는 온통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얼굴은 물로 씻은 듯 깨끗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길이 30㎝ 정도의 피 묻은 도끼가 있었다.
처음에 부인은 “남편이 자살했다”며 아버지를 죽인 둘째딸을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둘째딸은 조사과정에 “아버지를 죽이고 그 다음에 어머니에게 보고했다”고 털어놓으면서 살해혐의로 긴급체포됐다.
희생자는 현직 경찰관인 호쿠몬 와이치로(45)로 발견 당시 속옷차림인 것으로 볼 때 자다가 갑자기 공격을 받아 즉사한 것으로 보인다. 아내와는 오래 전부터 다른 침실을 사용하고 있었다.
스스로 범행을 자백하고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둘째딸은 살해 동기에 대해 “아버지의 복잡한 여성관계가 싫었다” “어머니에게 고통을 주는 아버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바랐다”며 아버지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드러냈다. 아버지가 정말로 부정을 저질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소녀는 전에도 주변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술집 여자를 집에 끌어들였다”거나 “밤에 에로틱 채팅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을 봤다”고 말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녀는 사건 5일 전에 근처 철물점에서 직접 도끼를 구입한 사실도 인정했다.
이 사건이 이토록 큰 화제가 된 데는 딸이 도끼로 아버지를 살해한 끔찍한 범죄라는 점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도끼’를 휘두른 범행상황이 특정 게임이나 만화의 내용과 매우 유사했다는 점이다. 사건이 보도된 직후 일본의 인기 인터넷 게시판인 ‘2채널’에는 “<히구라시>의 영향이다” “이 사건을 듣고 <히구라시>를 연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글이 많이 올라왔다.
<히구라시>는 동명의 인기 게임을 원작으로 만든 만화·애니메이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제를 그대로 번역한 <쓰르라미 울 적에>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산 속 마을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을 주제로 한 이 만화에는 여성 등장인물이 도끼나 야구배트 등을 사용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게임을 원작으로 한 또다른 애니메이션 <스쿨데이즈> 또한 이 사건을 연상시키는 작품. <스쿨데이즈>는 마지막 회에서 세 명의 주인공이 서로를 죽이며 피를 뿌리며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사건이 보도된 직후 <히구라시>와 <스쿨데이즈>는 TV 편성에서 긴급 제외됐다. 그러자 방송사에는 애니메이션 팬들의 항의의 전화와 메일이 쇄도했다. 이들은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검은 옷을 입은 어린 소녀가 칼이나 도끼 등으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이런 종류의 만화나 애니메이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소녀의 동급생 또한 “도끼를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만화가 떠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이나 강철로 만든 무기로 적과 싸우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장래 만화가를 꿈꾸던 그 친구가 매우 좋아하던 만화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살인을 저지른 동기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범행 방식이나 흉기 선택의 배경에 만화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편 방송사 측은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청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어 방송을 연기했다”며 “애니메이션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하고 있다.
소녀가 만화가를 꿈꾸며 미술전문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점도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동네 주민들은 그녀를 ‘인사를 잘하는 예의바른 아이’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녀를 최근에 만난 동급생들은 한결같이 “만화에 나오는 것 같은 짧은 머리에 검은 의상에 검은색 화장을 하고 눈썹도 밀어서 마치 ‘고스로리’같은 모습이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고스로리’란 ‘고딕+롤리타’의 일본식 준말로 레이스나 프릴이 달린 짙은 색의 중세풍 의상에 죽음이나 악마를 상징하는 장신구를 착용하고 창백한 얼굴에 검은색 화장을 해서 악마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내는 패션이다. 한 ‘고스로리’ 애호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 “소녀가 아버지를 살해한 기분을 이해할 수 있다. 고스로리 애호자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잘못된 것을 용서하지 않는 결벽증적인 면이 있다. 아마도 그 소녀는 아버지의 부정(不貞)을 목격하고 살해한 것에 대해 스스로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제로 경찰관계자에 따르면 소녀는 현재 “계획대로 목적을 달성하여 매우 만족해 보이는 상태”라고 한다.
이번 사건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는 “흉악범죄를 저지른 10대 청소년들의 경우 책이나 만화, 게임 등에서 묘사된 특수한 세계나 상황에 ‘세뇌’를 당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번 사건에서 일부러 범행 직전에 좋아하던 만화의 등장인물과 같은 복장으로 갈아입은 것을 보아도 그렇다. 단, 사춘기의 소녀가 아버지에 대한 살의를 갖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전체의 20~30%가 사춘기에 이런 과정을 겪는데 중요한 것은 부모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아이들의 심경 변화를 빨리 알아채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