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국당 지도부의 한 현역 의원은 사석에서 기자를 앞에 두고 청와대를 거칠게 비판했다. 더 심한 말도 했지만 지면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있는 내용이었다.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에 대한 9월 11일 국회 임명동의안 부결과 관련, “오늘 국회에서 벌어진 일은 무책임의 극치, 반대를 위한 반대로 기록될 것”이라며 야당을 강하게 비난한 청와대의 공식 입장 발표를 두고 한 말이었다.
‘김이수 부결 사태’가 강력한 후폭풍을 몰고 올 조짐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 여야간 암묵적으로 이뤄졌던 허니문도 깨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야당은 강한 야성(野性)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야당 공세를 막아내야 할 집권여당 더불어민주당은 청와대와도 불협화음을 내면서 집안싸움의 모습까지 보인다. 문재인 정부의 첫 번째 위기가 시작됐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자유한국당 정우택 원내대표가 11일 오후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뒤 이채익 의원 등 소속 의원들과 악수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허니문 끝, 난타전 시작
얼마 전 기자와 만났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정권 출범 후 1년간 새 정부와 여당을 야당이 상대하기가 몹시 벅차다”고 털어놨다. 정권을 잡은 뒤 1년 후 선거에서 여당이 진 적이 없을 만큼 정권 출범 1년 동안은 정부·여당이 ‘강한 지지세’를 안고 간다는 얘기였다.
홍 대표와 가까운 한 현역 의원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정권 출범 후 1년 동안 청와대 사람들은 물론, 모든 관료들, 그리고 여당 사람들도 매우 조심한다. 그래서 정권 출범 초기 야당은 정말 힘들다. 국민 정서도 ‘이제 막 시작했는데 좀 봐줘야 된다’는 시각이 강하다. 취임 초기 허니문이라는 얘기도 나오지 않는가”라고 한 뒤 “그런데 이 정부는 스스로 허니문을 차버렸다. 자기 길만 가겠다는 이 정부에 대해 국민의 강력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야당은 이제 국민의 목소리를 담아 이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강한 저항 세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원내교섭단체를 이루고 있는 야3당은 사실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이렇다 할 견제 세력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80%를 넘나드는 지지율 고공행진을 하고 있던 문재인 정부에 밀려 뒷방 스피커만 가동하면서 공허한 비판만 날리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야3당은 김이수 후보자 부결을 계기로 반전을 노리고 있다. 아니, 반전이 이미 시작됐다는 생각을 굳히고 총공세에 들어갔다. 야당 공세가 시작된 시기도 그 강도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불러오고 있다. 대정부질문과 내년 예산안 심의,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해온 각종 정책을 뒷받침해줄 법안 제·개정안이 올라와 있는 가을 정기 국회에 맞춰 야당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여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예산안과 부수 법안, 각종 개혁 법안을 처리해야 하지만 야당이 발목 잡기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정부·여당이 국민들에게 청사진으로 내놨던 정책들이 빛도 보지 못하고 사멸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부·여당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나 아동수당 지급안, 검찰과 국정원 등 권력기관 개혁을 비롯한 개혁 입법을 추진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국회선진화법은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이 동의해야 법안을 신속 처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여당 힘만으로는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야당이 이번 정기국회에서 총공세로 나올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정기국회는 야당이 힘을 과시하는 장이 될 전망이다.
#자유한국당 기사회생할까
9월 11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정우택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김이수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동료 의원을 얼싸안았다. 상당수 일간지가 그 다음 날 ‘얼싸안은 자유한국당’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진을 일제히 지면에 내걸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기울어진 운동장 국면에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던’ 자유한국당이 기사회생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11일 오전까지만 해도 자유한국당은 비난의 대상이었다. “안보를 사수하고 공영방송을 지키겠다”며 장외 투쟁에 나섰지만 여론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결국 슬그머니 국회로 들어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비난이 컸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한국당의 국회 복귀 첫날 헌재소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당으로서는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었다. 한국당은 인준안 부결을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당 지도부의 한 현역 의원은 “정말 몰랐다. 이렇게 될 줄은. 우리가 본회의장에서 얼싸안는 등 상기된 모습을 보인 것은 이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어찌됐든 한국당은 국회로 돌아온 첫날, 자력은 아니었지만 대어를 낚아냈다. 제1야당으로서의 체면을 살린 것은 물론, 국민들로부터도 “야당이 힘을 보여주네”라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더욱이 당의 결속력을 키운 성과도 만들었다. 한국당 소속 의원 107명 가운데 11일 표결 불참자는 5명. 지도부는 이들은 모두 불가피한 사유였으며 참석 가능한 모든 의원이 표결에 동참해 반대표를 던졌다고 자평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한국당은 여세를 몰아 기울어진 운동장 구도를 바꾸겠다는 포부를 갖기 시작했다. 올해는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을 통해 정부·여당의 단독 질주를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당은 일단 문재인 정부 최대 약점으로 지적돼온 ‘안보 무능’을 앞에 내세울 것으로 보인다. 각종 여론조사를 봤을 때 북한의 전격적인 6차 핵실험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은 일부 흔들리는 조짐을 보였다. 한국당은 이를 위해 9월 13일 이철우 최고위원을 단장으로 하는 의원 대표단을 독자적으로 미국에 파견하는 한편, 홍 대표가 미국 중국 일본을 차례로 방문해 자체 전술핵 외교에 나설 방침이다. 안보는 한국당만이 지킬 수 있다는 호소를 하며 보수 정당의 위상을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최대 지지 기반인 영남에서의 장외 투쟁도 병행하면서 세를 과시한다는 전략도 세웠다.
#캐스팅보트 쥔 국민의당 스탠스는
‘김이수 부결’의 핵심은 사실 안철수 대표가 이끄는 국민의당이었다. 국민의당이 표결에서 당론을 정하지 않고 자유 투표로 전환, 부결을 이뤄낸 것이었다. 그러나 ‘승리를 만끽하는’ 한국당과 달리 국민의당 속내는 다소 복잡하다. 정부·여당의 콧대를 눌러버리는 캐스팅 보트의 힘을 보여줬지만 강력한 지지기반인 호남 민심을 건드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의당은 여권의 비판에 적극적으로 반박하는 동시에 혹시 모를 ‘후폭풍’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김동철 원내대표는 9월 12일 원내정책회의에서 “김이수는 올곧은 법조인의 길을 걸어온 분으로, 견해 차이가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잘못도 없다”면서 “문제의 발단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있다”고 말했다. 호남 출신인 김이수가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용호 정책위의장도 “이번 투표 결과는 인사 난맥과 독선에 대한 경고”라고 규정하면서 “국민의당 의원들은 존재감이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캐스팅보트를 행사한 것이 아니다. 의원 개개인이 신중하게 고뇌에 찬 투표를 했다”고 강조하고 나섰다. 안철수 대표가 전날 임명동의안 부결 직후 “20대 국회에서 국민의당이 결정권을 갖고 있는 정당”이라고 발언한 것이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진화에 나선 것이다.
과거 사례도 국민의당의 고민을 키운다. 1988년 정기승 대법원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 부결 이후 당시 김종필 총재의 공화당은 거센 후폭풍에 휘말렸다. 당시 공화당이 충남 공주 출신인 정 후보자 부결에 앞장선 것을 두고 공화당의 지역적 기반인 충청권에서 비판론이 고조됐다.
국민의당도 전북 고창 태생인 김 전 후보자 낙마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텃밭인 호남의 지지율에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할까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이다. 실제로 국민의당을 향한 청와대와 여당의 비난 기류가 심상치 않은 가운데, 당 공식 홈페이지 ‘국민광장’ 자유게시판의 경우 여권 지지층의 비판글이 쇄도하며 접속이 마비되기도 했다.
#적진 앞에서 분열한 여당
야당의 파상 공세가 시작됐지만 청와대와 여당은 적진 앞에서 집안싸움이 난 형국이다. 야당의 공격을 막아낼 힘을 쌓기는커녕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와 관련, 13일 박 후보자에 대한 국회 상임위의 ‘부적격 청문보고서’ 채택을 묵인했다. 사실상 청와대 인선에 반기를 들거나 제동을 걸고 나온 셈이다.
민주당이 표면적으로 적격 보고서 채택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은 아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낙점한 박 후보자를 보호하는 방패 역할을 거부한 꼴이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문재인정부가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정부”라고 누누이 강조해왔지만 정권 출범 100일이 갓 지난 상황에서 당청 간의 이견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민주당 내부에서는 “청와대 인사가 엉망이다. 별 희한한 사람만 고른다”라는 불만이 노골적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중진급 이상 의원들은 “이럴 때일수록 여당과 청와대가 뭉쳐야한다”는 충고도 내놓는 중이다.
민주당의 한 현역 의원은 “민주당이 집권여당인데 여당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하고 청와대와 소통해야 한다. 뿌리가 다르다 할 수 없는 국민의당도 품어야 한다.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야 하는 책임이 여당에 있다는 것을 당 소속 의원들이 잘 아는 만큼 혼란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 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