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8월 25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국정농단 사건 59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사례1.
2013년 여름 한 공기업에서 중간급 간부로 근무하던 A 씨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고등학교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고 만났다. A 씨와 그 선배는 전혀 일면식이 없었다고 한다. A 씨는 “잘나가던 선배가 먼저 만나자는데 거절할 이유가 있겠느냐”면서 “그 후 술도 마시고 하면서 급격히 친해졌다”고 귀띔했다.
청와대 선배의 본색은 곧 드러났다. 그는 A 씨가 다니던 공기업 몇몇 임원의 평판에 대해 물었다. A 씨는 별다른 생각 없이 내부 기류 등을 전해줬고, 때로는 페이퍼 형태로 간략하게 정리해 선배에게 보내줬다. 그런데 A 씨는 자신이 전달한 내용 중 일부가 그 공기업 인사를 위한 자료로 쓰였다고 의심했다고 한다.
A 씨는 “당시 공기업 낙하산 인사가 화두였던 때다. 선배가 내게 (평판 조회를) 부탁했던 임원 대부분이 그 후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회사를 나갔다. 대신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들어왔다”면서 “또 다른 공기업에서도 아마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내가 회사 스파이 노릇을 한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나에게 술과 밥을 사주고 가끔 용돈을 줬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인 것 같아 그 후론 아예 연락을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사례2.
서울 소재 한 사립대 대학원생 B 씨는 2013년 12월경 업무 차 알고 지내던 한 사정기관 직원으로부터 ‘은밀한’ 제안을 받았다. 같은 과 교수의 동선을 파악해서 알려주면 소정의 수고비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교수는 박근혜 정권 외교 정책 등에 대해 칼럼과 토론회에서 날선 비판을 하던 인물이었다.
B 씨는 교수 일정 등이 담긴 문자 메시지를 그 직원에게 수시로 보냈다. 한번은 회식을 하고난 뒤 일부러 자청, 집에 데려다준다는 핑계로 주소도 알아내 전달했다고도 했다. 교수가 어디로 가는지 뒤를 밟은 적도 있었다. 사실상 교수를 미행했던 셈이다. 이는 그 사정기관 직원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B 씨는 한 달에 수십만 원가량의 돈을 받았다. 그 돈의 출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B 씨는 “교수의 일정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땐 조심스럽게 좀 따라가서 행선지가 어디인지, 또 거기서 무엇을 하는지 알려줄 수 있느냐고 부탁을 했다.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거절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년 가까이 지속됐다. 그 직원은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 것으로 안다. 그 후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최순실 게이트를 지켜보면서 나도 박근혜 정권 부역자 중 한 명은 아니었는지 후회했다”고 전했다.
#사례3.
현직기자 C 씨는 2014년 초 알고 지내던 수사기관 관계자로부터 뜻밖의 부탁을 받았다. 한 진보성향 단체가 주최한 비공개 세미나에 참석해 그 내용을 전부 녹취해달라는 것이었다. C 씨는 취재를 핑계로 세미나에 참석했고, 수사기관 관계자로부터 미리 받은 녹음기에 당시 전 과정을 녹취했다. 그 후에도 C 씨는 두세 차례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C 씨는 “기자로서 해서는 안 될 일이었지만 절친한 취재원의 부탁이라 거절하기 힘들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어떤 식으로든 세미나 자료를 구해오라는 상부 압박을 받고 (그 취재원이) 나에게 어렵게 말했던 것으로 안다. 박근혜 정부 전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했다. 그만큼 정부 성향에 반대되는 시민단체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위 사례들은 박근혜 정부 초반 다양한 방법으로 개인 또는 단체에 대해 사찰을 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국가기관에 의해 민간인이 동원됐다는 점에선 ‘댓글부대’를 연상케 하고, 민간인 뒷조사 부분은 MB 정권의 ‘민간인 사찰’과 흡사해 보인다. MB 때 민간인 사찰의 경우 국가기관이 직접 나섰다면, 이번엔 민간인의 배후에 있다는 게 다른 부분이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국가기관 직원들이 직접 사찰한 것보다 더 죄질이 좋지 않다. 국가기관이 민간인을 불법행위에 이용한 것 아니냐. 미행, 녹취 등 상상하기도 힘든 일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현직기자, 대학원생 등이 여기에 가담했다. 이들에게 지급된 돈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앞서의 B 씨는 이러한 사례들이 “빙산의 일각”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에게 미행을 부탁했던 사정기관 직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니다. 절대 피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 (윗선의) 반응이 좋아서 조만간 이러한 업무들을 별도로 관리하는 팀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여기서 언급된 ‘업무’에 대해 B 씨는 “민간인에게 미행 또는 녹취를 시키고 수고료를 주는 일을 전담하는 팀이 생긴다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했다.
민간인이 동원된 미행 등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고 정권 내내 반복됐다는 의혹에 대해 취재를 하던 중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고위직을 지냈던 한 인사가 의미심장한 말을 들려줬다. 그는 “국정원이 주도해 만들었던 댓글부대는 박근혜 정부 땐 별도로 활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다만, 여러 사정기관 관계자들이 머리를 맞대 만든 다른 형태의 사찰팀이 정권 2년차인 2014년 후반부부터 가동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 팀의 주요 임무는 요주의 인사들에 대한 정보를 모아 큰집(청와대)에 보고하는 것이었는데, 필요할 경우 미행과 녹취 등을 민간인들에게도 부탁하는 시스템이었다. 특수 활동비 명목으로 돈이 지급됐을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사정기관 관계자도 “공식적으로 움직이진 않았던 것으로 안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후 비선 쪽에서 그 팀의 보고를 받았겠구나 생각했다”고 했다.
이와 관련,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외곽 캠프에서 몸 담았던 한 정치권 인사가 이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은다. 그는 별도의 사무실을 만들어 이 일을 수행하고 돈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주로 진보성향 시민단체 관계자들에 대한 동향 보고를 맡았는데, 특히 미행 임무를 위해 또 다른 민간인들을 동원했다. 여기엔 박 전 대통령 팬클럽 출신 인사 여럿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