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딩크 “한국 축구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할 용의”
“(거스히딩크)재단 사람들을 통해 지난 여름 대한축구협회 내부 인사에게 감독이든 기술자문이든 뭐라고 언급하든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또 축구협회에서 원하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나의 제2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입을 열었다. 지난 14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에서 유럽 주재 한국 특파원들을 상대로 기자 간담회를 가진 히딩크 전 감독은 “한국 축구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할 용의가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지난 6일 히딩크 전 감독이 “한국 국민들이 원한다면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는 내용이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8일 만에 직접 입장을 밝힌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한국 대표팀의 감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내년 러시아 월드컵 때 미국 폭스 TV로부터 해설자 제안을 받았고 하기로 약속했다”며 “지금으로서는 대표팀 감독은 어려울 것이고, 자문하는 상황은 염두에 둘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감독이 아닌 기술자문이나 고문 등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뜻일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부분에서 히딩크 전 감독은 “현재로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말해두겠다”라며 즉답을 피했다.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지난 14일 낮 암스테르담 한 호텔에서 한국 취재진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대한축구협회에서 감독직을 제안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겨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어떤 형태로든 한국 축구를 돕고 싶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에 감독직 수용도 가능하다는 뉘앙스를 남긴 입장 발표로 볼 수 있다. 여우 같은 축구 감독으로 유명했던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은 여전히 ‘여우’ 같았으며 또 여전히 ‘배가 고픈’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국 축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많은 축구 팬들은 2002년을 회상하며 거스 히딩크라는 이름을 꺼내곤 했다. 그렇지만 세계 최정상급 감독으로 여러 나라와 클럽의 감독을 역임하고 있던 그를 다시 데려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가 먼저 한국 축구를 돕고 싶다고 말했다. 게다가 거스히딩크재단 관계자를 통해 ‘돈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입장까지 밝혔다. 한국 축구는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지만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당연히 국내 축구 팬들은 다시 히딩크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 “접촉 없었다”→“접촉 있었다”
‘히딩크 국내 복귀설’이 불거지자 대한축구협회는 단호한 반응을 보였다.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히딩크 감독은 명장이다. 상황 판단을 하시는 분이다. 지금 시점에서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제의를 하실 분이 아니다”라며 “히딩크 감독 본인이 말하신 건지, 제3자가 말하는 건지 궁금하다. 협회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쾌하면서 어처구니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또한 히딩크 측에서 협회에 따로 연락이 있었는지를 묻는 기자들에게 “전혀 그런 이야기 들은 적도 없다. 만약 있었다면 언론에 나갔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히딩크 전 감독은 지난 여름 대한축구협회 내부 인사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미 “전혀 그런 이야기 들은 적도 없다”고 했던 김 기술위원장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이에 대해 김 기술위원장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히딩크 측과 어떤 접촉도 없었다”며 “대표팀 감독과 관련해 히딩크 측과 어떤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문자나 메시지로 주고받은 것도 없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곧 상황이 급변했다. 14일 밤 김 기술위원장이 지난 6월 19일 노제호 사무총장에게 받은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개한 것. 그 내용은 ‘히딩크 감독이 한국 대표팀 감독직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김 기술위원장은 당시엔 기술위원장이 아니었기에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는 입장이다. 또한 6월 19일 이후에는 히딩크 측과 전화통화를 하거나 접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노 총장은 그가 기술위원장이 된 이후에도 전화 통화를 했으며 신태용 감독 선임 이후에도 연락이 지속됐다고 주장했다.
김호곤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사진=대한축구협회
이렇게 김 기술위원장의 말바꾸기가 계속되면서 상황은 히딩크 측과 대한축구협회 측 가운데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에 대한 진실게임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15일 김 기술위원장이 공식 입장을 내놨다. 기본적으로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카톡 메시지 한 통으로 제안하는 것은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는 생각을 밝힌 김 기술위원장은 노 총장에게 만나자는 내용의 문자를 두 차례 받았으나 답변하지 않았으며 지난 6일 히딩크 감독의 국내 복귀설이 불거진 뒤 전화통화를 한 게 처음이었다고 밝혔다. 전화 통화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노 총장과는 사뭇 다른 주장이라 여전히 진실게임은 이어지고 있다.
또한 “제안은 물론 지금 만날 의사도 없다”던 기존 입장을 뒤집고 “히딩크 감독을 비롯한 경험 있고 능력 있는 분들의 도움은 언제든지 수용할 의사가 있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놨다.
# 김호곤 “메시지로 감독직 제안 부적절”
6월 19일 노 총장이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는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히딩크 측과 어떤 접촉도 없었다”던 김 기술위원장이 말을 뒤집었다는 증거가 됐다. 권한이 없는 이에게 중요한 직책을 카톡 메시지 한 통으로 제한한 것이 적절한 방법은 아닐지라도 비공식적인 접촉이긴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내용은 히딩크 측에게도 그리 유리한 것만은 아니다.
메시지에서 노 총장은 기본적으로 ‘2018 러시아 월드컵 한국 감독에 히딩크 감독이 관심이 높다’는 의사를 전달하며 ‘이번 기술위원회에서는 남은 두 경기만 우선 맡아서 월드컵 본선 진출시킬 감독을 선임하는 게 좋다. 월드컵 본선 감독은 본선 진출 확정 후 좀 더 많은 지원자 중에서 찾는 게 맞을 듯하다’는 제안을 한다.
당시 한국 축구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란, 우즈베키스탄과의 두 경기를 남겨 놓은 상황에서 최종예선 통과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본선 진출 이후보다는 본선 진출 확정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감독을 교체하는 터라 ‘남은 두 경기만 우선 맡아서 월드컵 본선 진출시킬 감독’을 구한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경우가 없진 않았다. 최강희 전북 감독이 브라질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대표팀을 맡아 본선 진출까지만 ‘시한부 감독’ 역할을 하겠다고 자청했었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의 위기에서 소방수로 투입된 최 감독의 확고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만약 당시 히딩크 전 감독이 바로 투입돼 본선 진출을 이끌고 2018 러시아 월드컵 본선까지 책임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면 대한축구협회는 진지한 고민을 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당장 최종예선에 투입돼 본선 진출을 이끌 감독이 필요한 대한축구협회 입장에서 히딩크 감독 측의 이런 제안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카드였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게다가 힘겹게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낸 직후 히딩크 국내 복귀설이 제기된 상황이라 대한축구협회는 신태용 감독 지키기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깔끔하고 단호한 입장을 밝히지 못하고 말 바꾸기로 거센 비난 여론을 더욱 부추긴 대한축구협회의 대응에도 분명 문제가 있지만 히딩크 측의 제안 역시 정상적이진 않았다는 게 축구관계자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 결국 핵심은 경기력
결국 핵심은 경기력이다. 만약 신태용 감독이 이란전과 우즈베키스탄 전에서 좋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면 한국 축구의 위기를 극복한 영웅이 됐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답답한 경기력으로 힘겹게 이뤄낸 본선 진출이라 축구팬들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본선 진출을 일궈낸 게 아니라 강제로 본선 진출을 당했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한국 대표팀은 10월 7일 2018 러시아 월드컵 개최국 러시아와 친선경기를 갖는다. 이번 A매치가 성사되는 과정에선 히딩크 감독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딩크 전 감독은 모스크바 시내의 러시아 프로축구팀 구장에서 열리는 평가전을 관전할 예정으로 신태용 감독을 비롯한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들과도 자연스럽게 만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축구 팬들은 이번 친선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이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어떤 경기력을 선보일지보다 히딩크 감독의 행보에 더 관심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좋은 경기력을 선보인다면 히딩크 감독에 대한 관심이 조금은 사그라질 수 있겠지만 만약 또 다시 답답한 경기력을 선보일 경우 국내 여론은 더욱 요동을 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다. 본선을 대비하기 위해 다양한 A매치 평가전이 준비 중인데 신태용 감독은 평가전 때마다 감독교체론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조금이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기력을 선보일 때마다 감독 교체론이 고개를 들 것이며 히딩크의 이름이 다시 거론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