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김제동과 김미화, 그리고 배우 문성근과 김규리 등등. 국가정보원이 이명박(MB) 정부 시절 ‘좌파 연예인 대응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관리해 온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됐던 인사들이다. 이번에 처음 공개된 블랙리스트에는 모두 82명의 인사들이 이름을 올렸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광우병 파동을 계기로 반정부 시위를 하거나, 노사모 활동에 앞장섰다는 것.
국정원 적폐청산 태스크포스(TF)로부터 받은 자료를 토대로 MB 정부 시절 국정원이 운영했던 민간인 운영 국정원 외곽팀을 수사 중이던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 배경으로 수사 방향을 확대했다. 기존 수사 물줄기에 ‘블랙리스트’를 더 늘린 것인데 18일에는 배우 문성근 씨를, 19일에는 개그맨 김미화 씨를 각각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를 마쳤다.
배우 문성근이 지난 18일 블랙리스트 피해자로 조사를 받기위해 참고인 신분으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피해자를 조사하는 것은 검찰 수사의 시작점이다. 참고인이지만 피해자 자격으로 검찰에 출석한 문성근 씨와 김미화 씨는 일관된 진술 태도로 ‘국정원의 행동으로 피해를 봤다, 한탄스럽다’고 주장했다. 국정원이 제작한 배우 김여진 씨와의 나체 합성사진이 인터넷 상에 유포됐던 문성근 씨는 “나도 피해자지만, (광우병을 비판했던) 배우 김규리 씨가 더 큰 피해자”라며 “배우로서 역량을 발전시키고 활동할 시기에 집중적으로 배제당했다,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 불이익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수사의 시작점인 피해자 진술을 확보한 셈인데, 검찰은 국정원 적폐청산 TF로부터 건네받은 자료가 ‘구체적’인 만큼, 수사 성공을 자신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국정원이 스스로 개혁하겠다며 과거 치부가 될 자료들을 가져다주고 있지 않냐”며 “원래는 ‘원세훈 전 원장을 이미 기소했던 영역이랑 유사한 부분을 다시 수사할 경우 일사부재리 원칙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면 지금은 ‘너무 자료가 확실해 수사 실패하기가 더 어렵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 역시 “원래 국정원 수사는 외곽팀 압수수색 때만 해도 ‘남은 게 뭐가 있는지 보자’는 수준으로 시작한 게 맞다”며 “그런데 하다 보니 생각보다 나오는 게 많아진 수사”라고 밝혔을 정도다.
앞선 MB 정부 청와대 관계자는 이번 국정원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해 “정권 초였지만 촛불 때문에 고생했던 청와대와 국정원이 좌파 위주의 문화·예술계를 관리하겠다며 70년대 식 ‘거친’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다보니 발생한 사건”이라며 “그 당시 국정원에서는 애국을 다룬 소위 ‘국뽕’ 영화를 만들자는 얘기부터 집회 인근에서 대규모 아이돌 콘서트를 열어 10대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촛불 집회 분위기를 망쳐놓자는 얘기까지 나왔다”고 털어놨다.
방송인 김미화가 지난 19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열린 이명박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피해자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앞서의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국정원에서 만들어낸 문건을 확인했다면, 검찰은 그 다음 단계로 이 문건 내용들이 어떻게 방송, 영화 제작업계 고위 관계자들에게 압력으로 행사됐는지를 밝혀내야만 한다”며 “문제는 지금도 현직에 있을 고위 관계자들로부터 ‘국정원이나 청와대로부터 압력을 받았다’는 진술을 받아내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캐스팅 과정의 수많은 변수들 중 가장 큰 요인이 압력이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블랙리스트 수사가 새롭게 탄력을 받고 시작됐다면, 원래 수사의 큰 축이었던 여론 조작 외곽팀 운영 영역도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다. 검찰은 민병주 전 국정원 심리전단장에 대해 국고 손실과 위증 혐의로 구속했다. 민 전 단장은 민간인 ‘외곽팀’을 동원해 불법 선거운동에 개입하고 국정원 예산 수십억 원을 외곽팀에 활동비로 지급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미 원세훈 전 원장과 함께 지난달 말 파기 환송심에서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던 민 전 단장이지만, 새롭게 드러난 외곽팀 운영 혐의에 발목이 잡혔다.
검찰 관계자는 “민 전 단장 구속에 성공한 만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다시 처벌하는 것은 물론 MB 정부 당시 청와대로의 수사 확대 가능성도 올라갔다”며 “문제는 검찰이 수사를 통해 이명박 전 대통령을 참고인으로 불러올지, 피의자로 불러올지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고 털어놨다.
실제 국정원의 조직적인 음해를 받았다는 게 알려진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명박 전 대통령을 국정원법 위반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하면서, 이 전 대통령을 소환할 명분도 마련될 가능성이 높다. 앞선 관계자는 “수사 과정에서 MB 정부뿐 아니라, 박근혜 정부 시절 국정원에서의 운영 상 문제가 드러난다면 새로운 수사판이 열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귀띔했다.
‘공안’ 사건을 담당하는 박찬호 2차장검사(사법연수원 26기) 산하 수사팀이 국정원 상대로 활발하게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면, 한동훈 3차장검사(사법연수원 27기) 산하 특수 수사 영역도 첫 수사 타깃으로 삼았던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수사 매듭을 짓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방위사업수사부(이용일 부장검사)는 9월 19일 하성용 전 KAI 사장을 분식회계 의혹과 유력자 자제·친인척 부정채용에 관련된 혐의로, 피의자 신분 조사를 마쳤다. 하 전 사장은 ‘경영자로서 책임을 느끼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오해가 있다면 성실히 (검찰에) 답하겠다”면서도 “(비자금이 정치권으로 흘러들어간 적은) 없다”고 부인했다.
하 전 사장까지 소환에 성공하면서 수사 1라운드가 마무리됐지만, 분위기가 그리 밝기만 한 것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특수 수사에 밝은 한 검찰 관계자는 “원래 기업 수사는 기업 대표가 최종 목표점이 아니고 그와 관련된 정관계 인사가 목표인 게 일반적”이라며 “KAI 수사 초반만 해도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관계자들 이름이 거론됐지만 지금 KAI 수사팀에서는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얘기가 나온다, 2년 동안 방위사업수사부에서 들여다봐도 할 게 없어서 안 하던 것(KAI 방산비리)을 가지고 억지로 쥐어짜 성과를 만들어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라고 설명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경영비리 의혹 중심에 있는 하성용 전 KAI 대표가 9월 19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으로 피의자 신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지난 7월 14일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벌인 지 두 달여 만에 소환된 하 전 사장에게 검찰이 적용을 검토 중인 혐의는 사기, 배임, 자본시장법 위반, 업무방해 등 6∼7가지에 이르는데, 이를 놓고도 ‘문제만 도려내려다가 할 게 없어서 쥐 잡듯 다 턴 수사’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수사의 1차 성과 지표로 쓰이는 영장 발부율도 현격히 낮다.
검찰은 하 전 사장을 소환하기 전까지 모두 5명의 주요 피의자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이 중 영장이 나온 것은 2명에 그쳤다. 2명 중 한 명이 KAI 협력사 대표이고, 협력사 내 자금 관련 비리인 점을 감안할 때 온전히 KAI 내부 비리로 구속된 것은 1명뿐 인 셈.
이런 까닭에 3차장검사 산하 특수팀은 추석 연휴 이후 새로운 기업들에 대한 수사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분위기 쇄신에 나서겠다는 것. 이미 내사를 벌였었던 부영과 공정위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는 하림 등 기업들이 수사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특수 수사에 정통한 한 부장검사는 “원래 연휴 기간에는 출근하는 직원이 없어서 압수수색이나 자료를 받는 게 쉽지 않고, 소환도 힘들다”며 “새 수사 착수는 설이나 추석 연휴, 휴가 시즌이 끝난 다음 하는 게 일반적인 만큼 지금은 내사를 단단히 하고 추석 연휴가 끝난 뒤 압수수색 등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특히 “지금 공수처 신설을 비롯, 검찰 개혁이 화두이지 않냐, 정치인보다는 범죄 혐의가 확실한 기업을 수사 대상으로 선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