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9월 19일 오후 5시 기준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게시판에는 1만 5021개의 국민 청원글이 올라와 있다. 청와대는 지난 8월 17일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을 맞아 홈페이지 개편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역대 청와대에서 운영하던 게시판 기능을 강화해 국민권익위원회가 운영하는 ‘국민 신문고’ 외에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을 8월 19일 신설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게시판에 청원할 사안을 작성해 게재할 수 있다. 작성자가 아니더라도 게시된 청원 글 가운데 본인이 생각하는 방향과 같을 경우 ‘동의’를 표시를 할 수 있다. 청와대는 “일정 수준 이상의 추천을 받고 국정 현안으로 분류된 청원에 대해, 가장 책임 있는 정부 및 청와대 당국자(장관, 대통령 수석비서관 등)의 답변을 받을 수 있다”는 안내문도 게시했다. 동의를 많이 받은 청원에는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는 식으로 소통한다는 방침이다.
게시판에는 정치·사회·경제 등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각종 이슈들이 올라오고 있다. 현재까지 가장 많은 동의를 받은 청원은 ‘청소년보호법 폐지’로 19일 오후 5시 기준 27만 2150명이 지지했다. 이는 최근 부산에서 일어난 ‘여중생 폭행 사건’이 계기가 돼 9월 3일부터 청원이 시작됐고 강릉, 서울 청소년 폭행 사건이 잇따라 사회적 이슈로 부각돼 많은 동의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내용의 ‘소년법 폐지’ 청원도 12만 795명이 참여해 3위에 올라 있다. 다만 이 청원인은 27만여 명이 서명한 청원에 ‘소년법’을 ‘청소년보호법’이라고 잘못 명시해 청원을 다시 올렸다고 설명했다. 청원인은 이 청원에서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청소년들이 자신이 미성년자인 걸 악용하고 있다”면서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성인보다 더 잔인무도한 행동을 일삼고 있다”고 소년법 폐지를 주장했다.
2위에 오른 청원은 ‘여성 군 의무복무화’ 청원이다. 지난 8월 30일 올라온 이 청원은 “여성도 병역 의무를 수행하도록 법률이 개정돼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청원은 12만 3204명의 지지를 받고 있다. 양성평등이 이슈가 된 청원은 또 있다. 현재 1만 7716명이 참여해 7위에 올라있는 청원은 “1인 가구 여성 임대주택 70% 지원 정책 폐지”를 주장했다. 아울러 시골남성들의 매매혼 지원금 지급 중지를 요구하는 청원도 현재 1만 1007명이 참여해 10위에 올라있다.
정치와 관련된 이슈도 빠지지 않는다. 지난 11일 ‘자유한국당 위헌정당 해산 심판 청구를 요구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은 현재 6위에 올라있다. 이 글의 청원인은 ”자유한국당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부정하고 민의를 배반하며 적폐세력과 결탁하는 등 반민주적 행위로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며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에 실질적인 해악을 끼치고 있다”면서 “이들은 지난 60년 동안 국민 전체를 인질로 삼아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겨왔던 기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자신을 사립유치원 원장이라고 실명을 밝힌 사람이 올린 유아교육비용 지원방식 관련 청원(4위)과 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학생이 올린 기간제교원 정규직화 반대 청원(9위) 등이 상위 10위권 안에 올라와 있다.
청와대 업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거나 청와대가 다루기 적합하지 않은 내용도 상당수 올라와 있다. ‘히딩크 감독 선임 요구’와 ‘남성에 의무적으로 인공자궁을 이식해달라’는 내용의 청원이 대표적이다. 특히 지난 6일 게재된 히딩크 감독의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직 복귀를 요청하는 청원글은 현재까지 3000여 명이 청원에 동참해 적지 않은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국제축구연맹(FIFA)이 그동안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축구계 전반에 대한 외부, 특히 정치권의 압력과 간섭을 허용하지 않아 왔단 점을 보면 이 청원에 청와대가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또 인공자궁을 이식해달라는 내용의 청원도 현재까지 1500여 명이 동의했지만 관련 댓글엔 ‘터무니없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문을 연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연일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각종 이슈들이 속속 올라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사진=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일각에서는 이같이 작성이 쉽고 사안을 이슈화시키기에 좋은 청원의 특성 때문에 청원 페이지가 최근 심화된 성대결의 장으로 오용되거나 단순한 하소연의 창구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 여성 징병제를 주장한 청원인의 경우 처음 의도한 바와 달리 남녀갈등을 조장하는 내용으로 비치는 데 억울함을 표출했다.
이 청원인은 <일요신문>과 전화 통화에서 “처음부터 여성혐오나 남녀갈등을 조장하려는 의도로 글을 올린 것이 아니”라며 “30~40년간 우리나라는 저출산이 장기화되며 젊은층이 많이 없지 않나. 그래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병력난을 우려해 글을 쓰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일부 보수단체 등 특정 단체로부터 지지를 받아 본래 취지가 왜곡된 것 같아 아쉽다”고 덧붙였다. 최근 친박단체가 문 대통령 지지율 하락을 위해 이 청원을 이슈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주장이 언론보도를 통해 제기된 바 있다.
이 같은 문제를 청와대 청원 게시판이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위한 공간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꾸라지 때문에 농사 안짓거나 할 수 없듯이 다수의 국민들이 바라는 바가 뭔지 파악하고 소통할 수 있는 형태가 되기 위해서 그런 부작용이나 이상적인 문제들도 감내하거나 차차 정화시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청와대는 현재 베스트 청원 1위를 기록 중인 소년법 폐지 청원에 대해 청원 종료 시점인 11월 2일 전후를 기해 공식 답변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문 대통령은 지난 11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소년법 폐지의 경우 입법을 주관하는 부처로 하여금 검토하게 하라”며 내부 기준 마련과 검토를 지시한 바 있다.
김상훈 기자 ksanghoon@ilyo.co.kr
‘국민소통 및 제안’ 해외 사례는? 영국 ‘한국서 개고기 못 먹게 해주세요’ 청와대 홈페이지의 국민소통 및 제안 게시판과 같이 해외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미국의 ‘위더피플(We the People)’과 영국 정부·의회 청원사이트가 대표적이다. 사진=영국 정부·의회 청원사이트 캡처 실제 오바마 정부는 여러 차례 시민 청원에 답했다. 미국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처>가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오바마 정부가 사이트를 운영한 5년여 동안 227건의 공식 답변이 있었다. 이 가운데는 한국과 관련된 사안에 대한 답변도 있었다. 지난해 7월 등록된 한국에 대한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철회 요구 청원에 백악관은 “사드는 오직 북한의 핵탄도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데 집중될 것이며 북한의 중단거리 탄도미사일에 대한 양국의 공동미사일 방어 태세를 개선시킬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영국에도 정부·의회 청원 사이트가 있다. 영국의 청원 제도는 1만 명 이상 서명 시 정부의 답변을 들을 수 있고 10만 명 이상 서명하면 반드시 영국 의회가 논의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게 돼 있다. 이곳에도 한국과 관련된 청원이 있었다. 지난해 2월 등록된 한국 정부에 개고기 거래 금지를 촉구해야 한다는 청원은 10만 2000여 명이 서명해 9월 의회에서 관련 청원이 다뤄졌다. 당시 의회에 참석한 영국 외무부 알록 샤르마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은 “개가 멸종위기의 동물이 아니고, 개고기를 먹는 게 합법인 나라들에 영국이 취할 법적 조치가 없다”면서도 “한국 정부에 동물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견해를 알리고 개고기를 먹는 관행을 바꾸도록 애쓰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