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인터뷰에서 박철상 씨가 언론사에 제공한 사진.
지난 8월 세상을 경악시켰던 사건이 있었다. ‘400억 자산가’,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이름을 따 ‘청년 버핏’으로 불렸던 33세 경북대 재학생 박철상 씨. 그는 수천만 원에 불과한 종잣돈을 주식을 통해 400억 자산으로 불렸고, 이를 사회에 환원하고 있다고 해 대중의 박수를 받았다. 실제 박 씨 이름으로 경북대에 기부된 금액만 약 6억 7500만 원으로 30대 초반 나이를 감안하면 경이로운 액수였다.
박 씨는 이렇게 얻은 명성을 통해 TV에 출연하고, 강연에 나서고 책을 출간했다. 언론 인터뷰도 적극적으로 응했다. 인터뷰에서 홍콩 투자자문사에서 일했던 경력, 우량주를 선호한다는 주식투자 방법론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말은 모두 거짓이었다.
주식투자 전문가들에 의해 박 씨의 정체가 탄로났다. 박 씨는 400억을 번 적도 없을 뿐더러 주식을 해봤는지조차 의심 가는 상황이다. 언론 해명에서 주식으로 벌었다는 금액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박 씨는 가치투자연구소 커뮤니티에서는 5억 원을,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14억 원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26억 원을 주식으로 벌었다고 해 해명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또한 그가 주식 투자가 김태석 씨와 나눈 대화의 녹취록을 보면 ‘주식을 하긴 했냐’는 물음에 별다른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말했던 홍콩 투자자문사 등의 경력도 대부분 허위로 드러났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직접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신을 띄우는 ‘자작글’을 쓰기도 했다.
“우리 시대 현자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글은 박 씨의 칭찬으로 점철돼 있다. 당시에는 훌륭한 청년을 소개하는 글로만 읽혔는데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그 글이 재조명되고 있다. 글 작성자의 아이디가 박 씨의 좌우명인 ‘담박명지 영정치원’인 데다 아이디의 실명이 박철상으로 드러나 충격을 줬다.
그와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도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놨다. 박 씨 지인 A 씨는 “박 씨가 실제 만나보면 주식으로 수백억 벌었다고 하는데 평소 언행도 겸손하고 행동도 거들먹거리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안 봤는데 최근 보도를 보면서 기가 막힌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며 황당해했다.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의문은 남는다. 박 씨가 제공한 기부금은 존재하지만 그가 돈을 번 흔적이 없다는 점도 미스터리다. 그는 “자신의 뜻에 공감한 분들이 약 10억 원의 돈을 모아줬다”고 해명하지만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 힘들다. 이러한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손 들고 나서는 피해자가 없어 사정기관이 박 씨 수사에 착수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구경북 지역에 밝은 한 정치권 인사는 “굳이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박 씨에게 돈을 줄 사람은 많다. 박 씨는 경북대 재학생으로 대구지역에서 꽤 유명했다. 돈깨나 있는 사람이 기부금 세금공제에 집착하진 않는다. 박 씨가 10억 원가량의 돈을 받았다고 하는데 얼마나 받았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고 귀띔했다.
스스로를 기장이라고 사칭한 조은정 부기장. 사진=KBS ‘강연 100℃’ 캡처
2014년에도 박 씨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언론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조은정 부기장 사건도 있다. 그녀는 자신이 기장이라고 사칭하면서 기장 옷을 입고 다니고 책을 썼고 KBS에 출연해 꿈을 주제로 강연도 했다. 잡지와 인터뷰를 했고 각종 커뮤니티에서 그를 응원하며 기장의 꿈을 꾸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조 부기장은 심지어 중국항공사에 근무할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 방중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역시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박 씨나 조 부기장 수준은 아니더라도 리플리 증후군은 곳곳에서 번져 나가고 있다. 리플리 증후군의 특징은 뚜렷한 이득이 없을 때에도 거짓말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에는 이득을 좇지 않다가도 사람들이 속게 되면 수익 창출 모델로 변질되기도 한다. 또는 거짓으로 쌓은 명성을 통해 TV에 출연하고, 책을 내는 등 부가 수입을 얻을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리플리 증후군을 근절해야 하는 이유는 이 같은 거짓말이 사회적 비용으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뚜렷한 이득을 거두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런 거짓말들이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피로도를 증가시키고, 서로 못 믿는 사회 분위기를 만든다. 박 씨를 보며 주식 투자를 꿈꿨던 사람들은 박 씨가 거짓말로 점철됐다는 점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다. 전업 투자가 김 아무개 씨는 “나도 주식으로 큰 돈을 벌어 박 씨처럼 기부하며 살고 싶다는 꿈을 꿨는데 모두 거짓으로 드러났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고 토로했다.
과학계에서 리플리 증후군을 여럿 구별해냈던 박철완 전 드렉셀대 초빙교수는 “리플리 증후군이 늘어나게 된 배경은 온라인으로 비대면 소통이 가능해진 시대상황이 크고 구분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훔칠 수 있는 남의 경험과 삶이 인터넷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리플리 짓을 통해 사회적, 금전적, 정치적 이권을 탐하고 공익을 해치는 이들이 큰 문제다”라며 “일반인들은 단번에 구분하기 어렵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짜깁기된 삶이기 때문에 삶의 허점을 읽어낼 수 밖에 없다. 100% 리플리가 아닌 50% 리플리는 사실상 극소수 외에는 안 들킨다고 봐도 된다”고 조언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