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조 교수는 DJ와 결별했고, 당적을 두 차례 옮겼다. 국회의원과 당 대표도 지냈다. 대권에도 도전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서울시장 자리가 대권 도전을 위한 발판으로 여겨진 것도 어떻게 보면 조 교수가 ‘원조’인 셈이다. 이처럼 한국 정치·경제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조 교수가 올해 ‘구순’을 맞았다.
총재, 부총리, 당 대표, 전 서울시장 등 화려한 ‘스펙’을 갖고 있는 조 교수지만 정작 그는 교수로 불리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젊은이 못지않은 에너지를 뽐내고 있는 조 교수를 <일요신문>이 만났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하얀 눈썹’은 예전보다 더욱 빛이 났다.
조순 서울대 명예교수가 9월 21일 서울시 관악구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정훈 기자
―구순을 맞았다. 평소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
“소식한다. 적절한 운동을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 허허.”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지났다.
“지지율보다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가 문제다. 우리나라 경제와 사정을 감안해서 앞날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비전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소득주도성장이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하는데 말만 있지, 내용이 없다. 비전과 전략이 없다. 열의를 갖고 임하는 자세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소득주도성장은 문재인 대통령 핵심 공약인데.
“소득주도성장이라는 것은 사실 말이 성립되지 않고 경제 이론에도 없다. 성장을 하려면 국민총생산이 늘어야 하는 것이지, 소득에 따라 성장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문재인 대통령 말의 의미는 국민의 가처분 소득이 적은 가계에 대해서 도움을 주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 물건을 사게 만들고 물건을 사면 생산이 늘고 성장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일시적인 것이다. 사실 될지 안 될지도 확실치 않다. 소득주도성장이라고 하는 내용은 별로 설득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경제 정책은 어떻게 보고 있나.
“기업이 새로운 투자를 한다거나 새로운 생산 방법을 발견하고 또 창업을 하는 것이 성장의 기본이다. 고로 성장을 하려면 기업이 많이 생겨야 하고 기술 발전을 이뤄내야 한다. 하지만, ‘새 정부 경제 정책 방향’엔 어딜 봐도 그런 얘기가 나오질 않는다. 성장하기 위한 기본 조건이 구상에 나와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2020년까지 최저임금을 1만 원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올해 16.4%의 인상률을 적용했다.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기업이 잘하면 임금은 저절로 올라간다. 대통령 한 마디로 전체 임금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 할 수 없다. 물론 최저임금을 올리겠다는 의도는 좋다. 하지만 1년에 16.4%, 2020년까지 1만 원으로 최저임금을 올린다는 것을 대통령이 정해선 안 된다. 우선 기업이 자발적으로 하게 두고, 대통령이 정 그렇게 하고 싶으면 기업과 논의를 했어야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기업과 논의한) 흔적이 없어 보인다.”
―대기업 법인세도 올리기로 했다.
“정부 지출이 많을 테니 여유 있는 대기업의 세금을 늘려야 한다는 것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각국이 대기업에 대한 세금을 내리고 있는 추세다. 전체로 봐서 기업의 사정은 염두에 없는 행동 같다. 오히려 친기업 정책을 펼쳐, 기업에 기술 개발과 R&D 지출을 독려하고 권고하는 선에서 그쳤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한국 경제에 경제적으로 많은 부담을 줄 것 같다.”
―문 대통령이 일자리 문제는 직접 챙기겠다고 했다.
“일자리도 기업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임금, 일자리는 기업이 정하는 것이다. 물론 정부가 발언권이 있기는 하다. 공무원을 늘려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구상은 아주 잘못됐다고 본다. 지금 우리나라 공무원 수가 적지 않다. 알고 보면 불필요한 공무원들이 많이 있다. 공무원을 늘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운영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꾸 국민의 세금을 갖고 기구를 늘리고 공무원 수를 늘리는 것은 아주 하책이라고 본다.”
―부동산 정책 역시 찬반 논란이 뜨거운데.
“8·2정책 등 과거 정부 정책을 답습하고 있는데,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별 거 없었지 않나 싶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 관료는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가.
“(김동연 경제 부총리는) 종교인 찾아가서 세금 내라고 한다든지 이런 노력을 했다. 그런 사람들이 불로소득을 해선 안 된다.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4차 산업이 화두로 떠올랐다.
“우리나라에선 4차 산업이란 말을 붙여서 굉장히 떠들고 있지만 해외 언론에선 4차 산업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일상에 있는 기술 개발이지, 4차 산업 혁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 그런 것을 떠들면 다른 산업은 중요시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강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로봇 산업, 드론, 무인 비행기 등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기술 개발이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는데 그런 노력은 하지 않고 4차 산업의 중요성만 강조될 우려가 있다.”
―국가 경쟁력을 높이자는 말들을 많이 한다.
“정신 상태가 가장 중요하다. 국회의원은 국회의원대로 공무원은 공무원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힘을 모아서 협동심을 발휘해야 한다. 발전을 위한 정신이 가장 중요하다. 기업이 더 많이 생기고 더 많은 기술을 개발을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국민들이 너무 분열한다. 과거에 있던 일 파헤쳐서 서로 싸운다. 그거 해봐야 아무 의미 없다. 생산적인 싸움이 아니다. 자꾸 기구를 만드는 것은 안 좋다. 중소벤처기업부 같은 부처는 만들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중소기업을 위해 많은 기구를 만들고 건물을 만들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금 있는 사람들도 제대로 못 도와주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중소기업과 무슨 상관이 있냐. 부처를 계속 만드는 것을 보고 아주 실망했다. 무슨 일을 해야 될지 모르니까 자꾸 일을 벌인다. 중소기업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보다 도움 안 되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도 지지율은 높은 편이다.
“전 정부에 대해 국민들이 많은 실망을 했다. 보수가 몰락해버렸다는 말이다. 지지할 정당이 없으니 반사 효과로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높은 것이라고 본다.”
―내년 지방 선거에서 여권의 압승 가능성이 나온다.
“지지율만을 믿을 수가 없다. 나조차도 여론 조사 기관 전화가 오면 으레 전화를 끊어 버린다. 대답하기 싫은 사람은 문제를 물어보지도 않고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는 수도 많기 때문에 가봐야 알 수 있다.”
―보수가 궤멸한 상황 아닌가.
“어떤 나라를 막론하고 뼈대 있는 발전을 하기 위해선 보수가 건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보수가 죽었다. 나라의 비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보수 스스로가 못 해서 죽어버렸다. 우리나라 보수는 정신상태가 해이해져 있다. 별 대안은 없고 각자가 다시 제 정신을 차려야 한다.”
―문재인 정부에 조언을 해 준다면.
“앞서 밝혔듯, 비전과 전략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임기 5년이 금방 가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하려고 손대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몇 가지를 가지고도 금방 5년이 갈 것이다. 자꾸 많은 것을 하려고 하다 보면 아무 것도 못 하고 다음 정부에 부담만 전가한다.”
―많은 후학을 양성했다. 교육자로서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교육 정책 모두 잘못됐다. 공무원들이 교육에 너무 많이 간섭한다. 공무원들이 학교들 비리 적발하고 벌칙 적용하는 등의 공무만 집행하면 된다. 첫째, 학사는 대학에 맡겨야 한다. 수능도 공무원 편의주의에 의한 시험이라고 생각한다. 수능을 없애고 대학의 학사 정책은 각 대학 자율성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평준화를 집어 치워야 한다. 평준화를 안 하면 사교육이 많아진다고 하는데 오히려 반대다. 왜 잘하는 학교를 끌어내려 하향평준화를 시키려고 하나. 우민 정책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우리나라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의 질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족이 파괴돼 있다. 부모가 제 역할을 하지 않아 가정교육이 없어지고 있다. 국민 풍속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한글만 쓰면 엘리트가 나오질 않는다. 한자를 모르면 중국과 일본을 알 길이 없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알지 못하고 어떻게 자기 나라 역사를 알 수 있겠는가. 또 나라의 역사를 모르는데 어떻게 나라를 운영하고 어떻게 사회를 리드하겠는가. 애국은 나라를 사랑하고 문화를 사랑하는 일이다.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남의 것을 배타하면 안 된다.”
―첫 1기 민선시장이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이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
“첫째, 시장은 모든 것을 버리고 시민을 사랑하고 시민을 위해서 임기를 보내야 한다. 둘째, 청렴해야 한다. 셋째, 서울시의 비전을 가져야 한다.”
김경민 기자 mecury@ilyo.co.kr
시시콜콜 일문일답 “지금 대한민국은 괴짜가 필요해” 1928년생인 조순 명예교수는 올해 구순이 됐다. 인터뷰는 서울 관악산 인근에 자리 잡은 그의 자택 서재에서 이뤄졌다. 조 교수는 이곳에서 40년 가까이 살았다. ‘관악산 산신령’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산신령은 흰 눈썹으로 인해 생긴 말이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던 조 교수였지만 개인적인 질문을 건네자 영락없는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답을 들려줬다. ―정치 입문할 때와 지금 정치는 무엇이 다른가. “대책 없는 게 똑같다. 그때나 지금하고 달라진 것 별로 없다.” ―취미가 궁금한데. “책을 즐겨 읽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즐겨 드시는 음식은. “뭐든 지 잘 먹는다. 술은 완전히 안 먹는다. 술 안 먹은 지 10년 정도 됐다. 과거엔 약주도 많이 했다. 딱 결심하고 끊었다.” ―자녀를 교육할 때 철칙이 있었는지. “가슴에 와 닿은 질문이다. 나는 부모한테서 좋은 교육을 많이 받고 자랐는데 나의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부모가 나를 사랑하듯 나의 아이들을 생각했느냐 그건 아닌 것 같다. 난 나만 생각했다. 부모한테도 효도 잘 못하고 아이들한테도 아비로서 역할을 잘 못 한 것 같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웠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따지고 보면 많은데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지나간 일들을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이러다가 끝나는 거지. 허허.” ―가장 기뻤던 순간은. “다 지나고 보면 시시한 것이지만, 학교에서 상을 받는다든지 표창을 받았을 때나 벼슬에 올랐을 때가 기뻤다. 하지만 세속적인 기쁨은 다 부질없는 것이었다.” ―‘3포 세대’라는 말이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했다는 말은 ‘죽음’과도 마찬가지다. 더 큰 문제는 그런 말이 나와도 국민들이 시큰둥하다는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해야 하는데 웃고 넘겨 버린다. 말이 되는가. 이런 문제는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해줘야 한다. 미국은 연애할 기회를 학교에서 열심히 만들어준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신문에 사진과 소개를 넣어 결혼할 기회를 마련해준다. 아이 문제도 마찬가지다. 결국 시스템이 문제다.” ―젊은이들을 위한 책을 추천해 달라. “내가 읽으라고 해봐야 안 읽을 것이다. 허허. 책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 경제 서적같이 시시한 책 읽지 말고 몸에 수양이 되는 것들 읽으라.”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린다. “용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괴짜’가 나와야 한다. 개성이 뚜렷한 사람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