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추석 이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 등 국내외적으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쉴 새 없이 터졌다. 이에 따라 정·재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한 차례 큰 태풍이 지나가고 최대 열흘의 추석 황금연휴가 다가왔다. 명절이 오면 보통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가는 등 일가친척이 모여 함께 보낸다. 그렇다면 대기업 총수 일가는 어떻게 보낼까. 추석을 맞이하는 재벌 총수들의 표정을 들여다봤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월 25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뇌물공여 등 혐의 1심 선고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서 내려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은 이재용 부회장은 추석 연휴를 서울구치소에서 보낸다. 사진공동취재단
사촌 간에 운명이 1년 만에 뒤바뀌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울구치소에서 첫 번째 명절을 맞게 됐다. 앞서 8월 2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부장판사 김진동)가 1심 선고 공판에서 뇌물공여 등 핵심 5개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하며 이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항소심은 추석을 앞둔 28일 서울고법 형사13부(부장판사 정형식)에서 열린다. 이에 따라 이 부회장은 구치소에서 항소심을 준비하며 추석을 보낼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 총수 일가의 경우 이재용 부회장뿐만 아니라 아버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명절에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삼성서울병원 VIP실에 입원치료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벌써 3년이 넘었다.
이에 따라 삼성 일가 중에서는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과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패션부문 사장 등이 함께 보낼 것으로 보인다. 호텔신라 관계자는 “명절에 이부진 사장의 개인적인 일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광복절 특별사면 이후 지난 5월 CJ그룹 연구개발센터 ‘CJ블로썸파크’ 개관식을 통해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재현 CJ그룹 회장. 연합뉴스
이재현 회장은 이번 추석에 공식적인 일정은 따로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이재현 회장은 장손이기 때문에 자택에서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차례를 맡아 지낼 것으로 보인다.
CJ그룹 관계자는 “명절 차례 제사는 가족 행사이기 때문에 CJ인재원이 아닌 자택에서 진행된다. 삼성·신세계·한솔 등 사촌들도 참석한다. 다만, 참석자는 그때그때 달라진다”며 “삼성에서는 홍라희 전 관장이 거의 빠지지 않고 왔다. 또한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사장도 올 때가 있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구속 전에도 차례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재현 회장의 여동생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은 3년 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현재 미국에서 체류하고 있다. 이 과정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 퇴진을 압박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에 조만간 이미경 부회장이 귀국해 경영 복귀를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명절을 맞아 가족과 함께 보내기 위해 한국에 들어올 수도 있다. 이에 대해 CJ그룹 관계자는 “이미경 부회장의 귀국 계획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조위 청문회에 출석한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공동취재단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부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을 상대로 이혼조정신청을 제기한 이후 첫 번째 명절을 맞는다. 앞서 최 회장은 지난 2015년 12월 한 일간지에 보낸 편지를 통해 동거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의 존재를 공개했다. 이어 지난 7월에는 서울가정법원에 이혼조정 소장을 접수하기도 했다.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조정 사건 첫 기일은 오는 11월 15일 서울가정법원 가사12단독(판사 이은정)에서 열릴 예정이다.
현재 최 회장은 동거인과 함께 서울 한남동의 단독주택에서 거주 중이다. 추석 연휴에도 특별한 일정 없이 자택에서 보낼 것으로 보인다. 반면 노 관장은 서울 평창동의 자택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추석을 앞두고 악재를 만났다. 지난 19일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청에 출석해 16시간에 걸친 긴 조사를 받았다. 조 회장 부부에게 적용된 혐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이다. 조 회장 일가는 지난 2013년 5월부터 2014년 8월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자택의 인테리어 공사 비용 상당액을 계열사인 대한항공의 영종도 그랜드하얏트 인천 호텔 신축 공사비에서 빼돌려 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은 조 회장과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자택 공사에 끌어다 쓴 계열사 자금규모가 약 3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 회장 소환조사를 마친 경찰청 관계자는 “현재 아무것도 결정된 것은 없다. 보강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경찰은 늦어도 추석 연휴 전에는 구속영장 신청 여부 등 조양호 회장의 신병처리를 마무리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최악의 경우 조 회장은 구속 상태에서 추석을 보낼 수도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이번 소환조사 이후 경찰 측으로부터 신병과 관련해 따로 들은 바는 아직 없다”며 “허리 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추석에는 공식 일정 없이 가족들과 자택에서 보낼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조위 청문회에 출석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왼쪽부터). 사진공동취재단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 현대그룹, 현대산업개발 등 범현대가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부인 고 변중석 여사의 기일에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서울 한남동 자택에 모여 제사를 지낸다.
하지만 명절에는 기일처럼 한자리에 모이지 않고 따로 보낸다고 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오너 일가의 개인적 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서도 “명절이라고 범현대가가 정몽구 회장 자택에 모이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현대그룹 관계자 역시 “현정은 회장은 명절에 자택에서 조용히 보낸다. 차례를 지낸다고 해도 자택에서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차례를 지내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다.
금호가 형제 역시 명절을 따로 보낸다. 하지만 처음부터 형제간에 찾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재계 관계자는 “2009년 ‘금호 형제의 난’이 벌어지고도 2012년까지는 금호 오너 일가가 박삼구 회장 자택에 모여 차례를 지내는 등 함께 보냈다. 하지만 2012년 이후 명절을 따로 지내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관계자는 “현대가나 두산가 등 다른 기업들의 경우 오너 2세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벌어져도 3세 사촌 간에는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데 금호가는 박삼구 회장의 아들 박세창 금호아시아나 사장과 박찬구 회장 아들 박준경 금호석화 상무 등 3세들도 서로 연락하지 않고 교류가 거의 없다고 한다. ‘형제의 난’이 ‘사촌의 난’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지 우려된다”고 귀띔했다.
롯데그룹 일가 역시 형 신동주 전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과 동생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몇 년째 경영권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번 추석에도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동빈 회장은 만날 계획이 따로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동빈 회장은 서울 구기동 자택이 아닌 가족들이 있는 일본에서 명절 연휴를 보낸다. 롯데그룹 측은 “신동빈 회장이 추석 연휴 기간 전반부에는 주요 지역 매장을 둘러본 뒤, 주말쯤 일본으로 건너가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전했다.
아버지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은 추석 연휴 동안 서울 소공동의 롯데호텔 34층 거처에서 보낸다고 한다. 이에 롯데그룹 관계자는 “연휴 기간 동안 신동빈 회장이 개인적으로 신격호 총괄회장을 찾아 인사를 드리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
내우외환 시달리는 재계 총수들 추석 연휴 ‘경영 구상’ 몰두 나라 안팎으로 지난 1년은 어느 때보다도 변화가 극심한 시기였다. 국내에선 헌정 사상 초유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다. 이로 인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돼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을 강조하며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다. 또한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 결정에 따른 중국내 반한 감정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하고 있는 재벌 총수들. 왼쪽부터 구본무 LG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사진공동취재단 급변하는 정세와 맞물려 재계도 큰 영향을 받았다. 사드 보복으로 현대·기아차의 중국내 상반기 판매 대수는 43만 947대를 기록,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반토막 났다. 상반기 순이익 역시 2조 3193억 원으로 지난해 동기 대비 34.3%나 감소했다. 신세계그룹과 롯데그룹 역시 중국시장에서 손을 떼야 했다. 이마트는 올 연말까지 중국사업을 모두 정리하기로 했고, 롯데마트도 결국 중국 사업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시장에 진출한 지 각각 20년, 9년 만이다. 이어 한화그룹, 롯데그룹, 호텔신라 등은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박근혜 정부 면세점 사업자 선전 비리 의혹 사건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노심초사하며 지켜보고 있다. 또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은 금호타이어 인수를 두고 채권단과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다. 박삼구 회장 측은 산업은행에 금호타이어 자구계획안을 제출했고, 채권단 측은 이를 두고 주주협의회에서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처럼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재계 총수들 대부분은 명절에도 불구하고 자택에서 경영 구상에 몰두하는 등 녹록지 않은 연휴를 보낼 것으로 보인다. [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