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미 테네시 주에서 권투시합을 펼치고 있는 토냐 하딩. 로이터/뉴시스 | ||
14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한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녀린 팔과 다리, 수줍은 미소와 앳되어 보이던 얼굴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 이제는 살이 찐 둥근 얼굴과 우람한 근육질의 팔과 다리, 솥뚜껑 같은 주먹으로 상대 선수를 때려 눕히는 파이터가 그녀의 모습이다. 이렇게 변한 모습을 보노라면 과거의 하딩과 지금의 하딩이 과연 동일 인물인지 의심이 갈 정도.
그녀가 이렇게 변한 것은 은반 위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출당한 후 살아 남기 위해서 온갖 시련을 겪은 탓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녀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었다.
불행의 시작은 다름 아닌 1994년에 벌어졌던 ‘낸시 케리건 폭행 사건’이었다. 당시 케리건과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던 하딩은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출전권이 걸려 있는 전미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끔찍한 사고를 치고 말았다.
하딩은 전 남편 제프 길룰리와 몇몇 친구들을 시켜 케리건을 폭행하는 음모를 꾸몄다. 결국 케리건은 시합을 앞둔 어느 날 연습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쇠파이프로 오른쪽 무릎을 가격 당했으며, 결국 대회 출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반면 하딩은 케리건이 없는 무대에서 보란 듯이 우승을 차지,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케리건을 폭행한 용의자들이 속속 검거되면서 그 배후에 하딩이 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전미선수권대회 내내 그리고 올림픽 경기가 한창이던 중에도 하딩은 ‘범죄자’라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무릎 부상에서 완치된 케리건 역시 뒤늦게 동계올림픽 티켓을 따내면서 이들의 대결은 올림픽 사상 유례 없는 관심을 불러 모았다. 당시 릴레함메르에는 그 어느 동계올림픽 때보다 취재 열기가 뜨거웠으며, 하딩의 일거수 일투족은 연일 지면을 장식했다.
이런 부담 때문이었을까. 하딩은 올림픽 무대에서 형편 없는 연기를 선보이면서 망신을 당했다. 연기 시작 45초 만에 점프를 하다가 넘어지자 스케이트 끈이 끊어졌다고 울면서 심사위원석으로 다가가 재경기를 요구했다. 하지만 재경기에도 불구하고 하딩은 8위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반해 케리건은 은메달을 차지했으며, 당시 ‘천사와 악마’의 대결로 불리던 대회에서 승리하면서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 청부폭행 당한 직후의 낸시 케리건. | ||
이로써 하딩은 1999년까지 모든 공식대회에 출전하는 것이 금지됐으며, 미국스케이트협회에서는 영구 제명됐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16만 달러(약 1억 5000만 원)의 벌금과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던 하딩은 가까스로 감옥행만은 피할 수 있었다.
1991년 전성기 때만 하더라도 세계에서 두 번째로 ‘트리플 악셀’에 성공하면서 전미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촉망 받던 선수였던 하딩은 이로써 하루 아침에 ‘악녀’로 낙인 찍힌 채 무대에서 퇴장했다.
하지만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뜻하지 않은 ‘섹스 비디오’ 파문까지 터져서 그녀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전 남편 길룰리가 신혼 첫날 밤 촬영했던 비디오를 언론에 팔아 버린 것이다. 포르노 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수위가 높았던 이 비디오의 스틸컷은 <펜트하우스> 잡지에 대대적으로 실렸으며, 비디오 역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하딩은 “비디오를 찍을 당시 술에 만취한 상태였다”고 해명했다.
그리고 그녀의 막장 인생은 계속됐다. 1999년 은반 위로 복귀하면서 재기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이듬해 만취한 상태에서 남자친구를 주먹으로 때리고 자동차 휠로 가격한 혐의로 철창 신세를 지면서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다음으로 그녀가 선택한 ‘터닝 포인트’는 복싱이었다. 2002년 빌 클린턴의 성추문 스캔들 주인공이었던 폴라 존스와 복싱 시범경기를 선보이면서 화제를 몰고 왔다. 그리고 2003년에는 정식으로 프로복싱 선수로 데뷔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듯했다. 하지만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3승 3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면서 결국 이마저도 그만두고 말았다. 그녀가 복싱 선수로 변신한 것은 사실 돈벌이가 목적이었다. 집세도 낼 수 없을 정도로 파산했던 그녀는 스스로 “먹고 살 돈을 벌기 위해서 복싱을 한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저 열심히 일을 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하딩은 그 후에도 술에 취한 상태에서 남자친구를 폭행한 혐의로 다시 한 차례 체포되는 등 끊임 없는 구설수에 시달려왔다.
3년의 공백을 깨고 이번에는 격투기 선수로 사람들 앞에 나선 하딩. ‘하딩’하면 ‘케리건’의 이름이 떠오르듯 실과 바늘처럼 되어 버린 케리건에 대해서 하딩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에 그녀는 “케리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일 뿐 난 미래만 생각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의 바람대로 사람들 역시 과거의 ‘요정’은 깨끗이 잊고 미래의 ‘파이터’만을 기억할 수 있을까. 하딩의 험난한 격투기 인생은 이제 막 시작됐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