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클 스타 얀 울리히(왼쪽)와 테니스 스타 라파엘 나달. | ||
후엔테스의 고객이라는 의혹을 받은 선수들은 비단 사이클 선수들뿐만이 아니다. 유명 테니스 선수들을 비롯해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등의 축구선수들도 연루됐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현재 후엔테스 본인이 실명을 공개하길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어느 팀이, 또 어느 선수가 도핑을 일삼았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과연 그가 알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
사건이 처음 터진 것은 2006년 5월, 유럽 최대의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 대회’ 개막을 불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스페인 경찰은 ‘리버티 세구로스’ 사이클팀 감독과 후엔테스 등을 포함한 네 명을 ‘금지약물 제공 혐의’로 긴급 체포했다.
당시 경찰은 후엔테스의 아파트에서 200개의 혈액 주머니와 함께 적혈구와 혈장을 분리하는 혈액 분리기구를 발견했다. 또한 후엔테스의 고객으로 짐작되는 수백 명의 선수들의 이름이 적힌 메모도 압수했다.
사건이 터지자 당시 우승후보였던 얀 울리히, 이반 바소 등 9명의 사이클 선수들이 후엔테스의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로 출전을 정지 당했다.
당시 후엔테스의 아파트에 감시카메라와 도청장치를 설치했던 경찰은 그가 선수들과 접촉할 때 철저하게 가명을 사용하거나 수시로 휴대폰을 바꿔 사용했기 때문에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밝혔다. 가령 체포 직전 후엔테스와 통화했던 얀 울리히의 한 측근은 “세 번째 인물이 오늘 우승했다”라는 아리송한 말을 전달했다. 여기서 말하는 ‘세 번째 인물’은 다름 아닌 당시 이탈리아 사이클 대회에 출전하고 있던 얀 울리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경찰은 이런 정황을 토대로 수주에 걸친 수사 끝에 마침내 후엔테스를 체포했으며, 이로써 선수들이 어떻게 의사나 약물 딜러들과 접촉하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포 후부터 줄곧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후엔테스는 특히 언론과 경찰의 태도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유는 공개된 명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된 고객은 사실 사이클 선수가 아니라 테니스나 축구선수들이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들이 고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에 비해 사이클 선수들은 적은 수에 불과하다는 것. 전 사이클 선수인 예수스 만자노 역시 “프리메라 리가 소속의 유명 선수들이 후엔테스 사무실을 드나드는 걸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 도핑 의혹을 받고 있는 세계적 축구스타들. 왼쪽부터 호나우두, 지단, 라울, 베컴. | ||
그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은 스페인 정부의 발표 때문이었다. 당시 스페인 정부는 언론에 “테니스 및 축구 선수들은 이번 사건과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발표함으로써 ‘특정 종목 봐주기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이런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가운데 급기야 12월에는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가 FC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발렌시아, 레알 베트스 등 네 개 구단이 금지약물을 사용해 왔다는 기사를 폭로했다. 당시 <르 몽드>는 비밀리에 입수한 ‘후엔테스 리스트’가 그 증거라고 밝혔으며, 여기에는 2005-2006 시즌을 앞두고 후엔테스가 위의 네 개 팀을 도와준 사실이 적혀 있었다고 보도했다. 소문에 의하면 당시 <르 몽드>가 입수했던 ‘후엔테스 명단’에는 테니스 선수 라파엘 나달,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라울, 데이비드 베컴 등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클럽들은 이런 사실들은 강력히 부인했으며, 호나우두는 “우리는 유럽축구연맹이나 다른 단체에서 실시하는 약물검사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보도가 나간 후 발끈한 것은 후엔테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 몽드>의 보도를 부인한 그는 “나는 어떤 특정 선수나 팀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곧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는 <르 몽드>를 고소했으며, 얼마 전 스페인 법정은 <르 몽드>에게 도핑 의혹과 관련된 보도에 대해 30만 유로(약 4억 2000만 원)의 손해배상 및 정정보도를 명령했다. 하지만 <르 몽드> 역시 다시 항소할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 파동은 당분간 쉽게 끝나지 않을 전망이다.
한편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후엔테스는 오는 3월 내려질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는 “엄연히 도핑 검사에서 적발된 선수가 없는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라고 말한다.
사실 그의 말처럼 ‘혈액 도핑’은 금지약물을 복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도핑검사에서는 음성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런 행위는 세계반도핑기구(WADA)에 의해 분명히 부정행위로 규정되어 있으며, 올림픽조직위원회(IOC) 역시 ‘혈액 도핑’을 금지대상에 포함시켜 놓고 있다.
아직까지 ‘후엔테스 리스트’에 얼마나 많은 선수들의 이름이 올라 있는지는 비밀에 싸여 있다. 후엔테스의 입에 수백 명의 선수들의 생사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 후엔테스가 입을 열지 않기를 바라면서 무언의 압력을 가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