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 갑자기 휴가가 생겼다. 예상된 일정은 아니었다. 최근 연달아 있었던 프로젝트를 처리하느라고 피로 누적과 업무 스트레스에 온몸이 뻐근하다. 실컷 잠이나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난감하게도 출근 시간이 되자 반사적으로 눈이 떠진다.
그렇게 원했던 휴가인데 방바닥만 전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창때 매 휴일마다 함께 모터사이클 투어를 다녔던 녀석이다. 그와 통화 중에 동안 불현듯 올해 여름 단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래 바다를 보러 가자.
서둘러 라이딩 장비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오늘의 투어 파트너는 할리데이비슨 로드스터다. 시동을 걸자 1200cc의 V트윈 엔진이 꿈틀대며 살아났다. 마치 오랫동안 너를 기다렸노라 하는 듯이.
떠나자 동해 바다로
약속 장소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러시아워가 끝난 시간이어서인지 평소에 막히던 도심도 다소 한하다. 도시를 가로지르니 일탈의 쾌감이 몰려온다. 삼십여 분 정도를 더 달려 도시의 외곽에 이르자 저 멀리 잔잔한 강줄기와 푸른 산등성이가 눈에 들어온다.
2017 할리데이비슨 로드스터. 1200cc V트윈 에볼루션 엔진을 얹고 미드 마운트 컨트롤과 세퍼레이트 핸들바 설정으로 화끈한 달리기 실력을 자랑한다
약속 장소인 경기도 양평의 모 카페에 도착했다. 친구는 할리데이비슨 로우라이더를 타고 왔다. 70년대 아메리칸 차퍼 스타일에서 영감을 받은 낮고 길게 뻗은 차체와 늘씬한 실루엣이 아름답다. 1690cc의 큼직한 V트윈 엔진과 적극적으로 사용한 크롬 파츠가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인다.
친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시며 동해까지 갈 루트를 정한다. 돌아가지 않으면서도 자연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6번 국도를 타기로 했다. 채비를 마치고 둘이 함께 주행을 시작했다. 바람을 맞으며 가을이 시작되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2017 할리데이비슨 로우라이더. 아메리칸 크루저의 당당한 포지션이 연출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인딩 로드가 시작된다. 급할 것 없으니 최대한 여유롭게 풍경을 즐기며 비행하듯 와인딩 로드를 유유히 지난다. 산골짜기 사이로 수풀 냄새와 계곡 냄새가 은은히 퍼지며 폐부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다. 허파 안에 생기가 도는 느낌이랄까 기분마저 상쾌하다.
와인딩이 더욱 깊어지며 숏 코너와 헤어핀 코너가 나온다. 적극적으로 바이크를 기울이며 코너를 공략한다. 적극적으로 체중과 시선을 이동시키며 자연스럽고도 재빠르게 코너를 지나면 짜릿함이 뒷머리까지 끝까지 올라온다. 미러로 뒤를 보니 로우라이더를 탄 친구 녀석은 코너가 다 뭐냐 싶게 느긋하면서도 여유롭게 크루징을 즐기는 중이다.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마을을 만났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모터바이크 투어의 묘미 중 하나는 정해진 루트를 벗어나는 것. 어쩌다 보니 한적한 시골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다. 여름내 길러내 막 수확을 마친 붉은 고추들이 가을 태양을 맞으며 건조되고 있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마음이 다 따듯해진다.
어느덧 해가 기운다. 굽이굽이 이어진 와인딩 코스로 산봉우리의 그늘이 길게 드리운다. 햇볕이 떨어지는 양지를 지날 때에는 따듯한 햇살이 온몸을 간질이다가도 그늘에 들어서면 서늘한 바람에 온몸이 으스스하다. 차를 타고 갈 때라면 크게 느끼지 못했을 시간과 날씨의 변화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면 더 크게 체감된다. 이런 작은 감정들을 즐기는 것이 모터사이클 라이딩의 참 맛이 아닐까.
2017 할리데이비슨 로우라이더. 낮고 긴 롱엔 로우 차체와 커스텀 차퍼에서 영감을 받은 보디워크가 인상적이다
정동진의 일출
어둠이 내린 길을 한참을 달려 목적지인 정동진에 도착했다. 서둘러 숙소를 잡고 오랜 시간 라이딩에 지친 몸을 따듯한 샤워로 날려 보낸다. 저녁을 먹고자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어느 조촐한 우동집에서 따끈한 우동 한 그릇과 제육볶음 그리고 막걸리 한 잔으로 오늘의 여정을 복기했다. 오래간만에 친구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새벽 5시. 알람이 울린다. 창문을 보니 아직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았다. 일출로 둘째가라면 정동진 해변에는 벌써부터 일출 구경을 나온 관광객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중이다. 연인도 보이고 가족끼리 온 사람들도 보인다. 한 쪽에서는 일출 장면을 찍기 위해 삼각대를 펼치는 사진동호회 무리도 눈에 띈다. 해안으로 밀려드는 잔잔한 파도와 사람들이 만드는 소소한 분주함이 일출의 기대를 돋운다.
정동진 해안가에서 맞이한 일출
저 멀리 태양이 이마를 빼꼼 드러내더니 어느새 봉긋 솟아나 불그스레한 얼굴을 보여준다. 다행히 날씨가 맑아 완벽한 일출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일출 여행을 가더라도 구름이 끼거나 날씨가 흐리면 일출을 놓치기 십상인데 참으로 다행이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이 어느덧 쨍한 아침 햇살을 만들어 낸다.
2017 할리데이비슨 로드스터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원래 있었던 자리로. 생활은 반복되고 도시는 갑갑하겠지만 언제라도 떠날 수 있는 라이더의 열정이 있으니 그만하면 됐다. 친구와 함께 기념사진 하나를 남기고 다시 바이크에 앉았다. 자 이제 돌아가자. 언제든 다시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2017 할리데이비슨 (앞)로드스터와 (뒤)로우라이더
이민우 월간 모터바이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