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故 이승민 군의 유서. 사진=유가족 제공
승민 군은 극단적 선택에 앞선 지난 4월 28일쯤 한 차례 ‘결정적 신호’를 보냈다. 가해학생들의 괴롭힘에 못 이겨 학교에서 창 밖으로 뛰어내리려 한 것. 학교와 외부 정신건강센터는 즉시 승민 군과 상담하고 학교폭력 여부를 판단하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를 열었다. 지난 5월 16일 열린 학폭위는 이 사건을 “학교폭력으로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울산시청에서 열린 학교폭력대책지역위원회(지역학폭위) 역시 학교의 1차 판단에 손을 들어줬다. 학교는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1차로 학폭위를 열어 학교폭력 여부를 가리고 관련 학생 조치 사항을 정한다. 이에 불만을 가진 피해·가해학생 쪽에서 재심을 청구하면 도청이나 시청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2차로 지역학폭위를 연다.
사건이 뒤집힌 건 지난 9월 12일이었다. <일요신문>의 7월 보도로 수사에 착수했던 울산지방경찰청은 이날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동급생 9명이 승민 군을 평소 때리고 괴롭힌 사실을 확인했다. 9명은 폭행 등의 혐의로 울산지방법원 소년부로 송치됐다.
경찰 등에 따르면 이 사건의 은폐 중심에는 학교가 있었다. 학교는 1차 학교폭력 조사를 마친 뒤 승민 군의 개인적 문제로 극단적 선택이 벌어졌다는 조사 결과 자료를 작성했다. 승민 군 가방에 들어 있던 ‘빵 자르는 플라스틱 칼’과 ‘국기함 만드는 작은 망치’는 승민 군을 ‘망치와 칼을 학교에 가져오는 이상한 학생’으로 만들었다.
학교는 승민 군이 다시 시작된 정신병 때문에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식으로 조사 내용은 꾸몄다. 승민 군은 7년 전 모친을 잃은 슬픔에 정신병을 잠시 앓았었다. 그때뿐이었다. 입학 전까지만 해도 승민 군의 정신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학교는 승민 군의 개인사에 집중하며 극단적 선택 배경에 학교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승민 군 사건을 포함 경찰이 착수했던 학교폭력 수사 결과와 학교의 기초 조사 내용이 달랐던 근본적인 이유는 학교폭력예방법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었다. 학교폭력예방법에 따르면 학교장은 교감과 전문상담교사, 보건교사, 학교폭력 담당교사 등으로 이뤄진 전담기구를 배치해 피해·가해 사실 여부를 확인토록 한다. 학교폭력 기초 조사의 모든 열쇠를 학교가 쥐고 있는 셈이다.
외부 기관의 개입 없이 학교만 온전히 사건을 맡다 보니 학교 관계자는 사건 축소나 은폐·조작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학교폭력은 발생 즉시 교육청에 보고해야 하는 등 처리 과정이 복잡하다. 발생 자체가 고과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전해졌다. 이런 이유로 학교 입장에서는 학교폭력을 덮거나 조용히 지나가도록 처리하는 게 편하다. 그런데 현행법에는 은폐나 조작이 있어도 이를 형사 처벌할 수 있는 근거조차 없는 실정이다.
지난 8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A 양이 다녔던 전북 전주시 완산구의 한 중학교 안 풍경. 학교는 학교폭력예방 포스터를 A 양 죽은 뒤 교실 근처에 내걸었다. 이 사건은 학교 쪽의 은폐로 수면 아래 있다가 한 학생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최근 학교폭력은 인터넷과 SNS 등을 이용해 보이지 않게 모욕하는 등 교묘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자연스레 관련 사건 경험이 풍부한 수사기관이 처음부터 학교폭력을 조사하거나 학교폭력 전문기관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한 학교폭력 전문 경찰관은 “학교는 학교가 유리한 쪽으로 기초 조사를 마무리하기 마련이다. 학교폭력 발생 즉시 외부 기관이 개입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고 은폐나 조작이 있었을 때 강력하게 형사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돼야 할 것”이라고 일렀다.
더 큰 문제는 학교의 단편적 기초 조사 결과가 학폭위 결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학폭위는 학교 관계자와 학부모위원으로 구성돼 있다. 학부모위원은 학교폭력 관련 경험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럴수록 학부모위원은 학교의 조사와 학폭위에 참여한 학교 고위직의 판단만 믿고 가는 경향이 짙다. 학부모위원은 은폐·조작의 증거나 왜곡된 정보가 뻔히 보이는 학교의 기초 조사 자료와 주장도 걸러내기 힘들다는 게 학교폭력을 오래 담당해 온 경찰 관계자의 증언이었다.
학폭위에 참여하는 학부모위원의 비중립성도 문제다. 피해·가해학생의 학부모와 친한 학부모위원이 학폭위에 포함되면 중립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11월 21일 서울의 한 중학교에서 발생한 학교폭력 사건의 경우 6개월 이상 지속됐는데도 학폭위는 가해학생에게 1단계 서면 사과 조치만 내렸다. 이를 두고 가해학생 쪽 학부모가 학폭위 참여 학부모위원과 가까운 관계여서 가해학생에게 주어진 처분이 경감됐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가해학생에게는 최소 3단계 교내봉사가 주어졌어야 했다는 게 학교폭력 전문가의 당시 입장이었다. 학교폭력 가해학생은 폭력의 정도에 따라 1호 서면 사과부터 9호 퇴학까지 조치를 처분 받는다.
학폭위의 비전문성도 도마 위에 오른다. 지방자치단체가 여는 지역학폭위도 전문성이 떨어지긴 마찬가지다. 지난 5월 15일 천안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여학생 16명을 성추행한 6학년 남학생이 학교폭력 가해학생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학교는 가해학생이 ‘경계선 발달장애’를 겪고 있다는 이유로 학교폭력 아니라고 결론 지었다. 의학적으로 경계선 발달장애라는 말은 없다. ‘경계선 지능’만 있을 뿐이다. 경계선 지능이란 일반 지능과 지적장애 사이에 걸쳐 있는 지능 수준을 일컫는다. 학교는 가해학생 쪽의 비전문적인 주장만 그대로 믿고 말았다.
피해학생 학부모는 재심을 청구했다. 충남도청에서 열린 지역학폭위에 가서야 비로소 가해학생의 정확한 진단명이 나왔다. 가해학생은 지적장애와 ADHD를 앓고 있었다. 하지만 지역학폭위 역시 “장애 때문에 발생한 행동이지 학교폭력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신과 전문의의 소견은 1·2차 학폭위와 정반대였다. 정신과 의사 4명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계선 지능과 ADHD는 성추행과의 연관성을 찾기 힘들다”는 의견을 내놨다. 1·2차 학폭위 때 정신과 전문의는 단 한 명도 포함되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
“상대 장난에도 좌절… 7년 지나도 트라우마” 평생 따라다니는 학폭 상처 학교폭력 피해가 심각한 사회 문제인 이유는 정서적인 발달이 이뤄지는 시기에 받은 상처가 평생 피해자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7년 전 인천의 한 중학교에서 지속적인 학교폭력에 노출됐던 김 아무개 씨(여·21)는 지금도 여전히 트라우마 속에 살고 있다. 김 씨를 괴롭힌 건 폭행과 입으로 전달된 언어폭력이었다. 요즘처럼 학교폭력 관련 기사가 쏟아질 때면 김 씨는 급작스런 불안함이 엄습한다고 전했다. 지난 2010년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 씨는 “착한 척한다”는 이유로 끊임 없는 폭언과 은근한 따돌림에 고통 받았다. 따귀 맞고 머리채를 잡히기도 했지만 가장 살 떨리는 고통은 언어 폭력이었다. 가을쯤 동네의 한 공원에서 오후 3시부터 밤 9시까지 6시간에 걸쳐 이어진 언어 폭력은 아직까지 김 씨에게 악몽으로 기억된다. 낙엽이 보이면 그때의 기억이 온몸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김 씨는 졸업 이후 인간관계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고 말했다. 한 번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아무 의미 없는 상대의 행동을 확대 해석하는 식이었다. 김 씨는 “인간관계를 처음 맺을 땐 다들 웃으며 대하는데 조금 친해지면 짓궂은 행동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런 짓궂은 행동이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고 ‘또 다시 난 소외 당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난 예전에 이랬으니까 하고 말이다. ‘이번에도 또 실패하려나 보다’라는 말이 그냥 입에서 튀어 나온다”고 했다. 김 씨는 이어 “사춘기 때 벌어진 일이라 대인 기피증이 심하게 생겼다. 아픔은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마음의 상처는 그저 시간이란 이름의 약으로 잠시 덮어질 것일 뿐 온전하게 아물지 않는다“며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지만 아직까지도 치유가 되지 않았다. 완전한 치유를 목표로 또 다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볼 생각이다. 7년이 지난 이제야 학교폭력 피해자였다는 걸 말할 수 있다. 가슴에 대못이 박힌 채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살아 왔다. 나뿐만 아니다. 가족들이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아직도 피눈물을 솟으며 가족에게 미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최] |
“담임도 가해학생 편에…진심어린 사과 없었다” 남겨진 유가족 애달픈 사연 학교폭력은 피해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주변 가족들의 인생까지도 바닥으로 끌어 내린다. 특히 학교폭력이 피해학생의 ‘극단적 선택’을 자초하게 되면 유가족의 상처는 가실 줄 모른다. 6년 전 학교폭력으로 아들을 잃은 임지영 씨(여·53)는 “바람에 찬 공기가 섞일 때면 가슴이 아려 온다”고 전했다. 아들을 겨울에 잃었던 탓이다. 임지영 씨는 지난 2011년 12월 20일 아들을 하늘로 떠나 보냈다. 이날 오전 8시 대구 수성구의 한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고 권승민 군(당시 14세)은 7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 내렸다. 승민 군의 휴대전화가 복원되자 권 군을 괴롭혀 온 동급생 3명의 학교폭력이 세상에 알려졌다. 승민 군은 2011년 학기 초부터 동급생 3명의 끊임없는 집단 괴롭힘 속에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승민 군이 남긴 유서와 경찰 조사 결과 등에 따르면 가해학생 3명은 승민 군에게 밤새도록 컴퓨터 게임을 대신 시키는가 하면 부모에게 돈을 받아 오도록 했다. 고가의 점퍼를 구입 요구까지 이어졌다. 괴롭힘은 승민 군의 집에서 계속됐다. 가해학생들은 경찰 조사에서 “장난으로 한 일인데 이렇게 됐다”고 했다. 가해학생들이 장난이라고 말한 행동 가운데는 물 고문도 있었다. 가해학생들은 승민 군 가족 사진을 향한 욕도 서슴지 않았다. 승민 군이 죽기 하루 전에는 라디오 선을 뽑아 승민 군 목에 묶고 끌고 다니며 땅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라 강요했다. 라디오를 들고 무릎을 꿇게끔 했고 피아노 의자 위에 승민 군을 엎어 놓고 손을 못 쓰게 한 뒤 때렸다. 칼로 몸에 상처를 내려 하거나 승민 군 오른팔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승민 군 유서에는 ‘마지막 부탁’ 하나가 남아 적혀 있었다. “그 녀석들은 저희 집 도어키 번호를 알고 있어요. 우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가해학생과 학교 교사들은 아직까지 승민 군 가족에게 사과를 건네지 않았다. 사건 직후 가해학생 부모가 한 차례 와서 사과한 게 전부였다. 목적 있는 사과였다. 그들 손에는 가해학생 감형 탄원서가 들려 있었다. 임지영 씨는 “나 외에 학교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가장 큰 문제가 그 누구도 사과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라며 “진심이 담긴 사과가 필요하다. 사과가 없으면 ‘우리가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라’라는 보복 감정이 나오게 된다. 난 사람이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악하게 변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승민이가 떠난 뒤 승민 군 담임이 가해학생 편에 서서 법정 증언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기가 막혔다. 사과 한마디 없이 가해학생 편에 서서 증언했다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사고가 난 직후에는 경황이 없었다 치더라도 시간이 지나서는 사과하는 게 옳지 않나 싶다. 가장 기본적인 건 인간의 도리다. 도리를 다하지 않아서 화가 났다. 잠깐 그들의 불행을 원하는 나쁜 마음도 먹어 봤다. 미안해 하는 모습만 보여줬어도 해소됐을 것”이라고 했다. 임지영 씨는 대구에서 중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임 씨는 최근 연쇄적으로 불거진 학교폭력은 학교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학교의 책임이 크다. 최초에 제대로 처리만 해도 사건이 이렇게까지 안 커진다. 제대로 조사하고 진정한 사과가 따르면 이런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적다”며 “업무가 많다고 변명하지만 내가 교사다. 교사의 존재 이유는 학생이다. 학생을 잘 지켜야 한다. 아이를 잘 키우라고 월급을 받는 거다. 숨은 곳에 좋은 분도 많겠지만 사건이 벌어진 곳에 가면 대부분 학교는 학교폭력 처리에 소홀한 경향이 있었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좋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임지영 씨와 그의 남편, 승민 군의 형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좋아지는 게 아니다. 익숙해지는 거다. 아픔이라는 건 항상 같이 있으면 익숙해진다. 익숙하니까 견뎌진다. 아픔은 죽을 때까지 같이 가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07년 학교폭력으로 목숨을 끊은 故 강영준 군의 부친이 늘 가지고 다니는 당시 수사 기록과 아이들 사진. 그는 지난 8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전주 구석구석을 끊임없이 돌아 다녔다. 지난 8월 27일 오후 3시 59분쯤 전북 전주시 완산구의 한 중학교 3학년생 A 양(15)이 효자동 아파트 15층 옥상에서 투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강 씨는 A 양의 학교 주변과 A 양이 살던 아파트, 성당, A 양의 모친이 실려갔던 병원 등을 계속 돌았다. 학교폭력 단서를 하나라도 더 찾아 언론에 제공해주려는 목적이었다. 강막동 씨는 지난 2007년 5월 31일 학교폭력으로 막내 아들 영준 군을 잃었다. 그때부터 운영하던 사진관을 접고 주말에만 간간히 결혼식 사진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학교폭력 근절에 앞장서고 있다. 영준 군 사망 직후 학교가 아들의 책상과 사물함 물건을 즉시 없애는 등 은폐 광경을 목격한 뒤 더 이상 학교폭력 은폐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강 씨는 영준 군이 사준 수학여행 기념품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그의 99년식 준중형차 후방거울 아래 달려 있다. 강 씨는 노트북 가방 하나를 보물처럼 차 안에 넣고 다닌다. 빼곡한 영준 군의 수사 기록이다. “이걸 어떻게 버려요. 영준이 형에게 말했어요. ‘이 다음에 나 죽거든 그때 같이 화장해 다오. 그래야 좀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다’고요.” [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