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직전이던 9월 27일 저녁 국회 인근 한 식당. 술잔을 든 3선의 국회의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화합과 통합을 강조하는 건배사를 날려댔다. 새누리당이라는 한지붕 아래 한솥밥을 먹다가 바른정당이라는 작은집이 분가해 나간 이후 이날 처음으로 술잔을 다시 마주 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의 3선 의원들. 식당 내 분위기로만 봤을 때는 그들은 다른 지붕이 아니라 한 지붕 아래 사는 이들 같았다.
이날 두 당의 3선 의원 23명 가운데 한국당에서 강석호 권성동 김성태 여상규 유재중 이명수 홍일표 의원, 바른정당에선 김용태 이종구 황영철 의원 등 모두 12명이 참석해 ‘보수우파 통합추진위원회’를 만들기로 전격 합의했다.
바른정당 주호영 당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9월 14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전체회의에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박은숙 기자
# 자유한국당-바른정당 통합 임박
“해야지, 해야지. 하고말고. 된다카이.” 대구경북의 한 자유한국당 중진 의원은 바른정당과의 통합 가능성에 대해 이같이 말하며 “밥이 다 된 것 같다”고 했다.
이 중진 의원의 얘기처럼 ‘보수우파 통합추진위원회’를 만들기로 했던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의원들은 10월 11일 오전 국회에서 다시 만나 통합 논의의 속도를 높인다. 이날 모임에서는 통합추진위에 양당 인사들뿐만 아니라 보수우파 진영의 시민단체 인사들까지 포함할 것인지, 또 어떤 형태로 통합을 추진할 것인지 등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한다.
바른정당 전당대회가 11월 13일로 잡혀 있는 만큼 그 전에 통합의 틀을 잡는다는 계획을 서로 합의했다는 것이 양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르면 10월 말, 늦어도 11월 초에는 통합 여부에 대한 결판을 낸다는 얘기다.
이철우 자유한국당 의원은 9월 27일 모임 때 “국민이 보수우파의 분열을 많이 걱정하고 ‘연말이 되기 전에 (보수통합을) 결단하라’고 한다”며 국민의 요구와 지지를 따르려면 보수 통합이 시급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우 바른정당 의원도 모임을 마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보수가 뭉쳐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는 포장이고 대의명분이라는 말처럼 두 당의 국회의원들은 ‘공통의 적’을 내세워 명분을 쌓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실정을 막기 위해서는 보수가 뭉쳐야 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이다.
이종구 바른정당 의원은 9월 27일 모임에서 “지금은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하는 일을 보면 너무 좌파적이고 나라를 어디로 이끄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명백한 국가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런 때 보수우파가 정신을 차리고 뭉쳐야 한다”고 말했다. 바른정당 출신인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 역시 “주저할 시간이 없다. 문재인 정권 출범 4개월을 지켜보면서 보수를 통합하지 않고서는 독단과 전횡을 막을 길이 없다는 걸 체험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른정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간 권성동 의원도 “문재인 정부가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는, 그야말로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만 하는 행태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보수가 통합돼야 한다. 특히 큰집인 한국당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합 모임에 참석했던 의원들은 “3선이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라 이미 합당이라는 대세가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큰 집’ 자유한국당 속내는
자유한국당은 몸집 불리기가 아니고는 높은 여론조사 지지율을 바탕으로 ‘마이 웨이’ 행보를 계속하는 문재인 정부를 견제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보수가 힘을 합쳐야 제대로 된 야당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년 6월 지방선거에 대한 불안감도 한몫했다. 보수 진영이 쪼개진 상황에서는 표 갈라먹기를 통해 정부·여당 좋은 일만 시켜줄 수 있다는 위기감을 자유한국당은 느끼고 있다. 자유한국당 한 초선 의원은 “이대로 가면 대구도 위험할 수 있고 경북만 살아남는 최악의 지방선거 결과까지 나올 수 있다는 절박감이 당 내부에 강하다. 바른정당과의 통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했다.
당을 혁신한다는 명분으로 혁신위원회를 꾸렸지만 역할을 전혀 못했다는 자성도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서두르는 배경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한솥밥 먹던 선배·동료·후배들에게 ‘총질’을 하고 떠난 바른정당 의원들이 얄밉긴 하지만 혁신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의 추가적 추락을 막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통합을 이뤄야한다는 것이 절대 다수 의원들의 생각이다.
개혁 성향의 자유한국당 한 의원은 “당 지도부가 주도하는 혁신 작업에 전혀 체계가 없었다.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당 쇄신안을 먼저 추진하고 여론의 호응을 얻은 다음 전직 대통령에게 당 혁신 작업 마무리 차원의 용단을 촉구하는 것이 순서인데 계속 거꾸로 갔다. 지도부가 당의 혁신보다 장악에 관심이 있다는 평가가 나와서는 곤란하다”고 꼬집었다.
자유한국당 한 중진의원은 “위기일수록 당이 일치단결해야 하는데 혁신위는 이 역할은커녕 내부 분란만 키웠다. 혁신위를 믿을 수 없고 이젠 보수 통합을 보여줌으로써 국민들에게 마지막 읍소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 작은집 사정도 복잡
사실 보수 통합은 큰집보다 작은집에 더 절박한 문제다. 이혜훈 대표가 불미스러운 일로 물러난 뒤 ‘깨끗한 보수’를 표방했던 바른정당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졌고 결국 독자 생존 가능성이 없다는 분석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전당대회 무산론까지 나왔고 최근에는 당의 간판스타인 남경필 경기도지사의 아들이 마약 범죄에 연루돼 구속되는 대형 사고도 터졌다.
바른정당이 최근 개최한 토론회에서 발제자로 나선 박명호 동국대 정치학과 교수는 바른정당의 현 상황을 ‘내우외환·전호후랑·설상가상·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으로 규정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당의 진로에 대한 당원들의 생각을 심층 조사한 결과도 발표됐는데 조사결과에 따르면 당원들은 최근의 당 상황에 대해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한 당원은 조사에서 “이혜훈 전 대표와 남경필 지사 사건으로 함께 바른정당에 입당했던 친구들이 ‘타 정당과의 차이가 뭐냐’고 물어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고 하소연했고 상당수 당원들이 “바른정당이 자유한국당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차별화되는 모습이 없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11월 예정인 전대에 출마할 만한 인물이 제대로 떠오르지 않으면서 “과연 전당대회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부호가 끊임없이 만들어져왔다. 당의 계속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의원의 개별탈당 가능성까지 거론되기 시작했다. 누구 누구가 나간다는 얘기가 실명까지 달려가며 구체화됐다. 당의 내부 단결력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떨어졌다는 의견도 나오면서 ‘독자 생존’에 대한 희망은 최근 들어 급격히 약화됐다. 김명수 대법원장 인준동의안 표결 결과는 당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바른정당이 표결에 앞서 의원총회를 열어 ‘김명수 반대’를 당론으로 채택했지만, 하태경 의원이 표결 직후 찬성표를 던진 사실을 공개하면서 의원들 사이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주호영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가 “별난 사람과는 당을 같이 하기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물밑에 있던 당내 갈등이 다시 부상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뛰쳐나가려는 의원들이 급증하기 시작했고 통합 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힘을 얻어가는 중이다.
# 재결합, 산 넘어 산
본격적인 통합 논의가 시작됐지만 통합에 이르기까지 작지 않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양당 지도부의 움직임이 첫 번째 변수다. 양당 지도부가 얼마나 강한 통합에 대한 의지를 품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승민 의원을 비롯해 바른정당 내 ‘자강파’들을 어떻게 설득할지도 핵심 관건 중 하나다. 유 의원은 페이스북에 “사즉생. 죽음의 계곡을 건너겠다”는 글을 올린 바 있고 “정치적 합의가 충분히 이뤄지면 저도 (비대위원장직을 수용할) 각오를 하고 있다”고 밝힌 적도 있어 바른정당 창업주답게 통합 열차 차표는 절대로 끊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승민 의원을 비롯해, 친 유승민 계 몇몇 의원은 통합 대열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된다.
첫 번째 두 당 통합모임에 앞서 바른정당 참석자들이 유승민 의원과 김무성 의원, 주호영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에게 이날 모임을 사전에 통보했는데 유 의원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추진위 구상에 대해 김무성·주호영 의원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유승민 의원은 난감한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통합 방식을 둘러싸고도 불협화음이 나올 수 있다. 바른정당은 ‘당대당 통합’을 주장하고 있고, 한국당은 ‘흡수 통합’을 주장하는 상황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당 대표는 사실상 당 대 당 통합보다 흡수통합 쪽에 마음을 두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이와 관련, 바른정당 의원들은 “자유한국당이 주도하는 흡수 통합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방식은 당 대 당 통합이 돼야 하고 바른정당은 물론, 통합 모임에 참석했던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것이 바른정당 의원들의 얘기다.
한국당 한 중진의원은 “너무 몰아가서는 안 된다. 서로 체면을 세워줘야 한다. 바른정당도 지분을 갖고 들어오고 싶어 하고 얼굴도 세워줘야 한다. 이 부분은 우리가 조금만 양보해주면 된다. 통합이 우선이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탄핵과정에서 두 당 의원들이 얼굴을 이미 붉힌 바 있어 통합 논의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불협화음이 생긴다면 큰 불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시간이 별로 없는데 통합논의가 진척이 안 되면 바른정당 전당대회가 11월 13일에 예정대로 열릴 수도 있다. 전당대회가 열리고 바른정당의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면 통합논의는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 지방선거가 임박한 상황이라 이렇게 되면 각 지역 공천 문제가 걸려 통합이 완전히 물건너갈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