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프레임은 ‘적폐 청산 vs 신 적폐 청산’이다. 문재인 정부의 칼끝이 이명박(MB) 전 대통령을 겨누자, 자유한국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여의도 한복판에 세웠다. 2007년 대선 전후로 패자와 승자가 된 ‘노무현 vs MB’의 대결이다. 2008년 MB정권 출범 이후 사사건건 대립하던 이들은 문재인 정부 1년차 첫 국감에서 재격돌할 전망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모습. 일요신문DB
과거와의 전쟁을 둘러싼 양 진영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즉생 생즉사’다. 이들은 추석 연휴를 앞두고 투쟁 모드를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국감 전 추석 밥상머리 이슈에서 ‘노무현 vs MB’의 전초전을 벌이려는 전략이다. 여기에는 이 프레임이 불리하지 않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렸다. 여야 관계자 모두 “해볼 만한 승부”라고 입을 모았다.
당·청의 움직임은 전방위적이다. 문 대통령은 9월 26일 제1차 반부패정책협의회를 주재했다. 참여정부가 주도했다가 MB가 없앤 협의회를 ‘노무현의 친구’인 문 대통령이 부활시킨 것이다. 문 대통령은 “부정부패 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다”며 고강도 사정 드라이브를 예고했다. 지난 7월 공개한 문재인 정부 100대 과제에서 ‘적폐 청산’과 ‘반부패 개혁’은 제1·2 국정 과제다. 여권 한 관계자는 “내년에 국민권익위원회의 반부패 기능을 독립화, 국가청렴위원회를 만들 것”이라고 귀띔했다. 적폐 청산 프레임이 내년 지방선거 정국을 관통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의 발 빠른 움직임은 검찰의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방위산업체, 강원랜드 채용 비리 등에 대한 전방위 수사와 맞물려 파장을 일으켰다. 더불어민주당도 적폐 청산 모드에 돌입했다. 당 지도부는 MB정부의 대표적인 비리종합세트인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산비리)으로 향했다. 당 투톱인 추미애 대표와 우원식 원내대표가 선봉에 섰다. 추 대표는 한국당이 노 전 대통령의 뇌물수수 의혹에 대해 특별검사제(특검) 도입을 주장하자, “적폐 청산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우 원내대표는 “정치검찰의 독점된 권력사정 시스템이 아니었으면 100조 원 가까운 혈세를 허공에 뿌린 사자방 비리를 그토록 수수방관했겠느냐”며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구성을 촉구했다. 검찰에 사실상 사자방 비리 재수사를 촉구한 셈이다. 당 산하 적폐청산TF(태스크포스)는 MB 사자방을 직접 정조준했다. 국정농단 게이트를 파헤친 안민석 민주당 의원 등은 ‘국민재산 되찾기 운동본부’를 구성하고 MB는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 최순실 씨 등의 재산 환수에 시동을 걸면서 측면 지원했다. MB 측 관계자는 “도를 넘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MB와 전두환·박근혜 등 전직 대통령 소환도 임박했다. 이 판은 민주당 강경파가 이끌고 있다. MB는 국가정보원(국정원) 댓글 부대 의혹 및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전 전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5·18 발포 명령자 진상규명, 박 전 대통령은 국정농단 적폐 등의 올가미에 각각 얽혀있다. 여당은 국정원 개혁과 맞물려 있는 직전 정부 때의 이병기 전 국정원장 출석도 요구하고 있다. 당 핵심 관계자는 “이번 국감의 방향은 적폐 청산으로, 이명박근혜 정권 등 과거 청산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국민의당, 정의당과 함께 MB·전두환·박근혜 전 대통령을 고리로 연대 전선을 형성, 정계개편의 교두보까지 마련했다.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김명수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처리 과정에서 선거연대 딜을 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진보진영 한 관계자는 “정의당도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 도입에 사활을 걸 수 없는 만큼, ‘노무현 vs MB’ 승부 결과에 따라 정계개편이 본격화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한국당도 벼르기는 마찬가지다. 당은 문재인 정부 정책을 ‘신 적폐’로 규정하며 TF를 구성한 상태다. 당 내부적으로는 민주정권 1∼2기인 김대중(DJ)·노무현 정권에 ‘원조 적폐’를 덫 씌우는 전략을 세웠다. ‘김대중·노무현 vs 이명박·박근혜’ 구도를 노린 것이다. 한국당이 정한 3대 원조 적폐로는 ▲노 전 대통령의 640만 달러 뇌물수수 의혹 ▲두 정부 시절의 대북 퍼주기 ▲언론 탄압 등이다.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과 부동산 세금 폭등 등도 원조 적폐의 대표 격이다. 아울러 문재인 정부의 ▲안보 무능 ▲인사 먹통 ▲정치 보복 등도 ‘3대 신 적폐’로 명명했다.
한국당은 정진석 전 원내대표의 ‘노무현 자살’ 발언을 기점으로, 현 정부와의 전면전을 선언한 모양새다. 정 전 원내대표는 9월 20일 박원순 서울시장의 “최대 정치 보복은 MB가 노 전 대통령에게 가한 것”이라는 발언 이후 노 전 대통령이 부부싸움 끝에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했다. 정치권 안팎에서 문재인 정부가 MB정권에 칼끝을 겨누며 적폐 청산에 드라이브를 걸자, ‘노무현 소환’이란 맞불 전략을 통해 문 대통령에게 경고장을 날렸다는 분석이다. 정 전 원내대표는 정부의 적폐 청산에 대해 “조선시대 사화를 연상케 한다”고 연일 비판했다. 홍준표 대표도 “(정진석 논란의) 본질은 노 전 대통령 가족이 640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나, 안 받았나 여부”라고 주장했다.
정 전 원내대표 발언 이후 한국당은 노 전 대통령 사건에 대한 재수사 및 특검 카드를 꺼냈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보수층 결집 등 정국 반전을 위한 승부수를 꺼낸 셈이다. 한국당은 사안별로 국민의당·바른정당과 공조를 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두 당이 응할지는 미지수다. 국감 쟁점이 고차방정식으로 얽혀있어서다. 당장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여당 의원들은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조현옥 인사수석, 야당 의원들은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등의 출석을 놓고 강하게 충돌했다.
국방위 핵심 이슈인 국정원 댓글부대 증인 대상자인 연제욱 전 사이버사령관, 이태하 전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장 등을 놓고도 이견차를 보였다. 운영위와 국방위에서는 각각 문재인 정부 인사 참사, 북핵 위기,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추가 배치, 전술핵 등을 놓고 난타전이 예상된다.
경제 상임위에서는 적폐 청산의 핵심축인 ‘재벌 개혁’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기재위에서는 현 정부 경제라인(장하성-김상조-김동연)과 함께 직전 정부 때 서별관회의에서 벌어진 조선해운 구조조정 관련 청문회를 놓고 충돌이 불가피하다.
장외전인 여야의 저격수 초선 의원들의 행보도 관전 포인트다. 이들은 올해 국감부터 도입되는 ‘국감 증인 신청 실명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박용진 더불어민주당·채이배 국민의당 의원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정미 정의당 의원(현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박 의원은 이미 9월 초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서정 CGV 대표 등을 국감 증인으로 신청하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현대기아차의 리콜 사태와 영화 독과점 사태의 진상을 국회 차원에서 규명하겠다는 게 이유다. 채이배 의원은 9월 17일 삼성전자를 비롯해 현대자동차, 네이버, KT, 다음카카오, 엔씨소프트, 삼표, 금호아시아나, 국민은행 관계자(실명 비공개)를 소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의당 대표인 이정미 의원은 이틀 뒤인 9월 19일 문재인 정부가 칼끝을 겨눈 MB를 비롯해 SK케미칼(가습기살균제), 롯데하이마트(불법 파견), 강원랜드(채용 비리), 석포제련소(불법폐기물) 등도 부르자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일명 ‘김영란법’(정무위), 지진 대비(안행위), 원전 대책(산업통상자원위), 공영방송 정상화(미방위), 복지예산 및 C형 집단감염(복지위), 누리과정 예산(교문위) 등을 둘러싼 여야의 기 싸움은 국감 정국을 뜨겁게 달굴 것으로 보인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