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9월 28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취재진들과 티타임을 가지고 있다. 박은숙 기자
벤처 1세대 신화 주인공이었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카이스트 교수로 재직하던 2011년부터 ‘시골의사’로 유명한 박경철 씨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청춘콘서트를 개최, 청년 멘토로 급부상했다. 정치권은 이런 안 대표에게 지속적인 러브콜을 보냈다. 특히 오세훈 전 시장 중도하차로 치러지게 될 서울시장 후보로 영입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2011년 9월 1일 한 매체는 안 대표 측근의 말을 인용해 “안 교수가 서울시장 출마 결심을 사실상 굳힌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그 직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안 대표는 서울시장 후보군으로 꼽히던 나경원 한나라당 최고위원, 한명숙 전 총리,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 등을 제치고 단숨에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안 대표는 9월 6일 박원순 상임이사를 지지하겠다며 불출마를 선언했다. 아무런 협상이나 조건 없는 통 큰 정치로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지지율 50%가 넘었던 한 자릿수에 불과하던 박 상임이사에게 후보직을 양보했기 때문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이틀 앞둔 10월 24일엔 박 상임이사를 직접 찾아가 지지 의사를 재차 밝혔다.
순식간에 안 대표는 대세론을 형성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 대항마로 떠올랐다. 안 대표는 18대 대선 가상 대결에서 47.7%의 지지율을 얻어 박근혜 전 대통령(38.3%)보다 9.4% 포인트 앞섰다. (2011년 11월 11일 동아일보와 코리아리서치가 4∼8일 전국 19세 이상 유권자 4000명을 대상으로 임의전화걸기(RDD) 방식으로 조사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 이번 조사의 최대 허용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1.5%포인트다)
하지만 안 대표는 12월 1일 “학교 일과 재단 설립 일만 해도 많다. 다른 일에 한 눈 팔 수 없다. 신당 창당이라든지 강남 출마설 등 여러 가지 설이 많은데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전혀 그럴 생각도 없고 조금도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는 2012년 새해가 밝자 미국으로 출국해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와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 등을 만나 기부재단 설립과 IT업계 현황 등을 논의했다. 이를 두고도 일각에선 안 대표가 미국에서 대선 구상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리고 2월 6일 안철수재단 설립계획 발표 기자회견에서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면 좋은 것인지 고민 중이다. 정치도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다”며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7월 19일 안 대표는 사회 각종 현안에 대한 대안과 정국 구상을 담은 <안철수의 생각>을 발간했다. 며칠 뒤에는 <SBS> 예능 프로그램에 전격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서 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이 부진한 가운데 안 대표 지지율이 치솟자 정치권 안팎에선 대선 출마 요구가 거세졌다.
결국 안 대표는 장고 끝에 대선 출마를 전격 선언했다. 안 대표는 2012년 9월 19일 “저는 이제 이번 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함으로써 그 (국민들의 정치변화) 열망을 실천해내는 사람이 되려 한다. 저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진심의 정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안 대표의 트레이드마크인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은 이때부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당시 대선 후보 단일화 TV 토론에 나선 안 전 대표는 처음으로 이마를 크게 드러냈다. 안 전 대표는 문재인 당시 후보와 단일화를 놓고 줄다리기 협상을 벌이던 중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간만 보고 마지막에 발을 뺀다’며 그를 ‘간철수’로 불렀다.
대선 직후 미국으로 출국해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안 대표는 2013년 4월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배지를 달게 된다. 그 해 11월엔 새정치연합 창당을 공식화했다. 하지만 세몰이에 실패하면서 2014년 3월 민주당과 합당해 새정치민주연합을 출범시켰다.
안 대표는 새정치민주연합 공동 대표를 지냈지만 같은 해 7월 재보선에서 패배해 책임을 지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문재인 체제’가 출범했고, 안 대표는 문 대표가 추진하던 당 혁신안을 놓고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2015년 말 “두려움을 안고 광야에 서겠다”며 탈당을 선언했다.
안 대표는 또 다시 이마를 드러낸 헤어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는 신당창당을 준비하던 2015년 12월 28일 “지금 제 머리(스타일)는 5살 때 이후 세 번째로 바뀐 거다. 중학교 들어갈 때 머리를 밀었던 게 첫 번째, 군대 들어갈 때가 두 번째였다. 지난주에 세 번째로 바꿨다. 그만큼 제 각오와 결기가 대단하다고 인정해주시면 좋겠다”고 했다.
2016년 초 민주당 탈당파와 함께 국민의당을 창당한 안 대표는 2016년 총선에서 ‘야권 분열 필패’라는 공식을 깨고 38석의 의석과 정당 득표율 2위(26.7%)를 기록하며 부활에 성공했다. 하지만 불과 2개월 뒤 ‘리베이트 파동’이 터지면서 안 대표는 다시 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안 대표는 2017년 조기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당 대선 후보로 출사표를 던졌다. 이때 안 대표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강철수’의 등장이었다. 3월 25일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을 이길 도전자 누구입니까. 문재인을 이길 개혁가 누구입니까. 문재인을 이길 혁신가 누구입니까”라며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지지자들도 화답하듯 “강철수”를 연호했다. 한때 지지율이 급등하면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양강 구도까지 이뤘지만 네거티브 공방전과 TV토론 등을 거치며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 그는 3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았다.
대선 패배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당에선 제보조작 사건이 터졌다. ‘새정치’를 외치던 안 대표에겐 치명타였다. 그는 “국민의당을 3당 체제의 한 축으로 만들어줬던 국민들의 간절한 열망 잊지 않고 있다”면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 지금까지 정치하면서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먼저 사과하고 책임질 일 있으면 예상을 뛰어넘는 정도까지 책임을 져왔다. 이번에도 어떻게 하면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인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겠다”고 했다.
하지만 안 대표는 당 안팎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당을 살리겠다”며 전당대회에 출마했고, 대표직에 올랐다. 그리고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 부결 사태에서 국민의당 캐스팅보트 역할을 톡톡히 행사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안 대표는 부결 직후 “우리가 20대 국회 결정권을 가졌다”고 발언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안 대표는 “문재인 청와대야말로 적폐다. 헌재 소장 표결 이후 (국민의당을 공격하는) 청와대과 민주당 행태가 도를 넘었다. 헌법과 법률에 근거한 국회의 의결을 공격하는 청와대의 행태는 삼권분립의 민주 헌정 질서를 흔드는 일”라며 오히려 맞받아쳤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선 안 대표를 ‘막철수’라고 부르기도 한다.
9월 19일은 안 대표가 정치에 입문한 지 꼭 5년이 되는 날이었다. 안 대표는 “앞으로 국민의당과 제가 추구할 방향은 당이 중도통합의 중심 세력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계입문) 만 5년을 맞이한 제가 생각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에 대한 생각이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김경민 기자 mercu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