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사랑하는 국민’의 히딩크 집회
[일요신문] 지난 9월 한 달간 대한민국 축구계는 ‘히딩크 논란’으로 뜨거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표팀이 러시아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지만 곧이어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을 의사가 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무기력한 대표팀 경기력에 답답해하던 여론은 과거 영광을 만들었던 명장에 집중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네덜란드에서 “한국을 돕고 싶다”며 직접 입을 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본인의 “지금으로선 대표팀 감독을 맡는 것은 어렵다”는 말에도 ‘히딩크 감독 모셔오라’는 여론은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 ‘히딩크 모셔와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특히 온라인에서 히딩크 감독을 향한 열망은 폭발적입니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도 그의 한국 대표팀 부임을 촉구하는 글이 올라올 정도입니다. 이어 포털 사이트 축구 뉴스에 달린 댓글에는 ‘촛불집회’를 진행하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시청 광장으로 나가자’는 의견이 모인 지난 9월 9일에는 실제 집회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스포츠 전문매체 <스포츠니어스>에서는 이날 시청 광장 현장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이들은 ‘주최 측 추산 1명, 경찰 측 추산 1명’이라며 이날 분위기를 요약했습니다.
가벼운 에피소드로 끝날 것 같았던 ‘히딩크 집회’는 실현될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종로 경찰서에 “9월 23일 오후 2시에 집회를 하겠다”는 신고가 접수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장소는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앞이었습니다.
히딩크 집회 현장
집회가 예고된 23일 오후 2시 축구회관 앞은 평화로웠습니다. 지난 9일과 마찬가지로 조용히 지나가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성곡 미술관에서 축구회관을 지나 축구회관주차장 방면 사거리 모퉁이에서 실제로 집회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집회를 주도한 우병철 씨는 “시청 광장이나 광화문 광장은 사전에 서울시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축구회관 앞으로 왔다. 하지만 건물 바로 앞은 사유지이기에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자신들을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이라 지칭하는 집회 참가자들은 축구협회에 불만을 표하는 현수막을 달고 손에도 이 같은 카드가 들려있었습니다. 이 같은 준비와는 달리 참가율은 저조했습니다. 수백 개의 ‘참가하겠다’는 댓글과는 달리 현장에는 5명이 전부였습니다.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의 성명서
이어 “요구사항이 이행되지 않으면 추석 연휴 이후 대규모 촛불집회를 진행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어떤 혐의로 김 위원장을 고발 할 계획이냐”는 한 뉴스 통신사 기자의 질문에는 잠시 눈동자가 흔들리기도 했지만 “기술 위원장 자리에 앉아 전횡을 휘두르지 않았나. 히딩크 감독 측 제의를 숨기고 신태용 감독을 자기 마음대로 앉히며 대국민 사기극을 펼쳤다”
그는 적은 참가 인원에 대해서는 “종로 경찰서에 집회 신고를 하러 갈 때는 이보다 많았다. 15명 정도였다”면서 “그때 같이 갔던 지인들이 조기축구회원들이다. 주말에 경기가 잡혀 있다 보니 함께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집회 참가자들은 비상 연락망을 만들겠다며 간단한 신상정보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명부에 적힌 그들은 대부분 60년대 생이었습니다. 우 씨는 이에 대해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길 바랐지만 없어서 아쉽다. 젊은이들이 앞에 나서고 우리 7080세대는 뒤에서 서포트 하는 형태를 계획했다. 홍보가 부족했다는 생각도 든다”면서도 “우리는 과거 군사 독재 시절 거리에서 화염병 던져가며 군사독재 타도, 정의 등을 부르짖던 세대다. 한국 축구를 사랑하는 2030세대도 많이 참가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5명으로 시작한 집회는 조금씩 인원이 늘어났습니다. “지인 결혼식에 갔다 와서 늦었다”며 20대 참가자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tv’에서 활동하는 크리에이터 ‘엄신선’도 현장을 찾았습니다. 그도 히딩크 감독의 국가대표팀 복귀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휴대폰으로 촬영하는 모바일 생방송에 집회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현장에 모인 이들은 각자 온라인에서 집회 소식을 보고 모였습니다. 한 참가자는 부산에서 상경해 하룻밤을 자고 집회에 참가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현 신태용 감독은 기술위원회 불공정한 회의의 산물” 이라면서 “신 감독은 최종예선 2경기에서 무능력함을 보였다. 결과가 나쁘면 감독이 경질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습니다.
# ‘히딩크 집회’ 계속될까
이 같은 움직임은 앞으로도 지속될 기미를 보입니다. 몇 가지 구호를 외치던 시위 참가자들은 곧 나무 그늘에 앉아 각자 의견을 내놓으며 토론을 펼쳤습니다. 각자가 생각하는 한국 축구와 축구협회의 문제점을 늘어놓았습니다. 대표팀의 경기력을 질타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축사국 온라인 카페 메인화면
그러던 중 한 참가자가 ‘축구를 사랑하는 국민(축사국)’의 온라인 카페 개설을 제의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던 이들도 동조하며 카페 개설은 급물살을 탔습니다.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개설된 카페는 9월 28일 현재 회원 수 600명을 넘어섰습니다. 카페에는 하루에도 수십 개씩 축구협회를 지탄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히딩크 영입 론에 동조하지 않은 스포츠 기자를 ‘기레기’라 부르며 블랙리스트를 만들기도 합니다.
소셜 미디어에도 축사국 페이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시위 현장에 뒤늦게 합류한 20대 참가자가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습니다. 100명이 조금 안 되는 인원이 소식을 받아보고 있습니다.
지난 26일 대한축구협회는 기술위원회를 소집했습니다. 김호곤 위원장은 회의 이후 기자회견에서 신태용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고 히딩크 감독에게는 도움을 받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히딩크 감독의 대표팀 부임이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이는 가운데 세를 넓히고 있는 축사국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