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유복해 보이는 여인은 처녀시절 아이를 낳아 버린 후 다른 남자와 결혼해 행복한 인생을 보냈다. 버린 딸이 찾아와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버려진 딸은 고생하며 자라서 평범한 가정을 꾸미고 살다가 어느 날 말기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모를 한번 쯤 보고 싶었다. 심부름센터에 부탁해서 생모의 주소를 알았다. 사람을 통해 생모에게 한번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생모는 단호하게 자신은 그런 딸을 낳은 적이 없다고 하면서 거부했다.
딸은 그런 엄마를 한번 보기 위해 힘든 몸을 이끌고 그 집 문가에 와서 간절한 눈빛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녀의 눈이 번쩍 크게 떠지면서 분노의 빛이 번들거렸다. 그녀는 문가의 돌을 집어 안 쪽을 향해 힘껏 던졌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 소리를 뒤로 하고 힘없는 걸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죽기 싫다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늘에서 세상에 나오고 외롭게 죽어가는 인생이었다. 일본영화 ‘행복목욕탕’의 한 장면이었다.
오랫동안 변호사를 하면서 그런 영화보다 더 절절한 현실을 여러번 경험했다. 여배우와 부잣집 아들 사이의 불꽃같은 사랑으로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었다. 미혼의 여배우가 아이를 낳았다는 게 언론에 보도되자 남자 쪽에서 단호히 연락을 끊어버렸다. 기혼자였기 때문이다. 아이가 열 살 무렵 나의 개인법률사무실로 찾아왔다. 책상 높이의 키인 작은 아이의 조그마한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변호사 아저씨 우리 아빠 나쁜놈이예요. 죽여주세요”
어린 아이의 마음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 얼마쯤 후에 아이는 포장을 한 작은 향수병을 내게 선물했다. 포장에는 이렇게 쓴 작은 카드가 있었다.
‘아저씨 우리 엄마하고 친구해 줄 수 없어요?’
그의 아버지는 철저히 그들 모녀를 외면했다. 나는 소송을 통해 그 아이를 아버지의 딸로 입적시켰다. 시간이 흐르고 아이는 어느새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부자집 아들인 아버지는 모녀에 대해 냉정했다.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어른이 된 아이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할머니와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어른이 된 그 아버지의 딸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한번 아버지의 집을 찾아갔어요. 할머니부터 시작해서 그 집 식구들이 얼음보다 더 냉냉하더라구요. 그 집 재산 때문에 겁을 먹는 것 같았어요. 다시는 찾아가지 않았죠. 엄마는 일이 없어요. 알바를 하면서 엄마와 먹고 살아요. 음식점에서 설거지를 하고 냅킨을 접으면서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몇 가지 일을 겹쳐 하고 있어요.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거죠? 내가 세상에 나온 게 누구 책임인가요?”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오는 그런 아이들이 참 많았다.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을 때면 할 말이 없다. 자식을 버린 아버지나 엄마의 사랑어린 따뜻한 눈빛만 한번 봐도 아이들의 가슴에 퍼렇게 든 멍이 단번에 반쯤은 풀린 텐데.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