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북부지방법원은 딸의 친구 중학생 A 양(14)의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지난 8일 어금니 아빠 이 아무개 씨(35)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서울 중랑경찰서에 따르면 이 씨는 딸의 초등학교 동창인 중학생 A 양 시신을 강원도 영월의 한 야산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씨는 A 양을 서울 중랑구 망우동 자택에서 목 졸라 살해한 의혹도 받고 있는 상태다. 하지만 살인 의혹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어 우선 구속영장은 시신 유기 혐의에 대해서만 발부됐다.
8일 경찰 조사에 출석하는 어금니 아빠 이 씨. 연합뉴스
사건의 시작은 A 양의 실종부터였다. 지난달 30일 망우동 이 씨의 집으로 놀러 갔던 A 양이 귀가하지 않자 A 양 부모는 경찰에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씨의 자택 근처 폐쇄회로 TV를 분석한 경찰에 따르면 A 양은 지난달 30일 오후 12시 17분쯤 이 양과 함께 이 씨 집이 위치한 건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A 양의 행적을 뒤쫓다 이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수사를 전개했다. 수사망을 좁혀가던 경찰은 이 씨 부녀가 지난 1일 오후 5시 18분쯤 검은색 대형 가방을 BMW 차량에 싣고 강원 영월군을 향했던 정황을 발견했다. 경찰은 이 가방 안에 A 양의 시신이 담겼을 거라고 내다봤다. 이 씨 부녀가 탄 차량이 1일 영월 요금소를 지난 기록 역시 확보됐다. 이 씨 부녀는 1일 오후 7시 32분부터 오후 9시 52분까지 시신이 유기된 장소 부근에 머물렀다. 이튿날인 2일 오후 7시쯤 강원 정선군의 한 모텔에 입실해 얼마간 머문 뒤 이른 새벽 서울로 돌아왔다.
경찰은 5일 오전 10시 20분쯤 수락119안전센터 등의 도움을 받아 이 씨가 범행 직후인 3일 서울로 돌아와 계약한 서울 도봉구 도봉동의 한 빌라 문을 강제로 열고 이 씨 부녀를 붙잡았다. 당시 현장에 출동했던 수락119안전센터 관계자는 이제껏 언론에 알려진 바와 달리 “부녀 모두 현장에서 발견됐을 때 의식이 명료했다. 다만 거동은 불편했고 본인이 약을 먹었다고 주장해서 병원으로 일단 이송했다”고 밝혔다. 이 씨 부녀는 현장에서 서울의료원으로 옮겨졌다.
현장에서 이 씨를 추궁하기 시작한 경찰은 이 씨의 자백을 근거로 지난 6일 오전 9시쯤 강원도 영월군의 한 야산에서 A 양 시신을 찾았다. 이 씨는 시신 유기만 인정했을 뿐 살인 의혹은 전면 부인했다. 이 씨는 앞서 아내의 투신 사건을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약을 보관했는데 집에 놀러 온 딸 친구가 그 약을 모르고 먹어 사고로 숨졌다는 내용의 동영상을 자신의 태블릿 PC에 남겼었다.
중학생인 딸의 친구를 살해하고 야산에 유기한 혐의를 받는 이모 씨의 자택인 서울 도봉구 도봉동의 한 빌라 전경. 최준필 기자
이는 경찰의 A 양 부검 결과와 배치된다. 경찰은 A 양의 시신에서 목 뒤 점출혈, 목 근육 내부 출혈, 목 앞부분 표피 박탈 등 타살 정황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추정 사인은 끈에 의한 경부압박질식사다. 경찰은 이 씨의 딸 역시 시신 유기에 가담한 정황이 있다고 판단해 수사를 확대하고 나섰다. 이 씨의 딸은 현재 스스로 호흡은 하고 있지만 의식은 없는 상태다.
이 씨의 부인 최 아무개 씨(여·32)는 사건에 앞선 지난달 5일 망우동 자택 5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경찰은 남겨진 A4용지 4장 분량의 유서를 근거해서 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봤다. 다만 최 씨 시신에서 발견된 일부 상흔이 투신하기 앞서 생겼다고 확인돼 경찰은 이 씨에게 자살 방조 혐의점을 두고 최 씨의 사망 사건 관련 내사를 벌여 왔다. 최 씨가 남긴 유서에는 최 씨가 어린 시절부터 가족 등 여러 사람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최 씨의 성폭행 피해가 부부싸움의 원인이었다고 보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최 씨는 여러 해에 걸쳐 시어머니의 동거인에게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했다고 최근 이 씨에게 털어놨다. 이 문제를 가지고 최 씨가 심하게 자책했는가 하면 해결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부부가 심하게 다퉜다고 전해졌다. 지난 8일 강원 영월경찰서에 따르면 최 씨는 사망 4일 전인 지난달 1일 “시어머니의 동거인에게 2009년부터 여러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며 B 씨(60)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한 바 있었다.
최 씨가 B 씨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한 기간은 남편 이 씨가 딸의 치료비 마련차 미국으로 떠난 때였다. 최 씨는 남편이 한국에 없는 동안 시댁이 있는 강원도 영월에 머물렀다. 경찰은 최 씨를 두 차례 불러 조서를 받았고 B 씨를 한 차례 소환해 조사했다. B 씨는 혐의를 부인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아직까지 A 양이 숨진 이유는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경찰은 아내 최 씨가 투신했을 당시 이 씨의 자택에서 발견된 성인용품 여러 개와 A 양 죽음과의 연관 여부도 추가로 조사하고 있다. A 양 부검 결과 성폭행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시신이 알몸으로 발견됐던 까닭이다. 성적인 학대 증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정밀감식을 하고 있다.
한편 이 씨가 평소 몰던 차량과 관련 딸을 이용해 사치스런 생활을 해 왔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이 씨는 포드 토러스 차량을 소유하며 누나 명의의 현대 에쿠스를 주로 탔다. 강원도 영월로 향했던 차량은 BMW였는데 지인 소유 차량이지만 형과 이 씨가 함께 탔다. 이와 별도로 이 씨 소셜 미디어에는 아우디 차량도 함께 올라온 적 있었다. 거주지 인근에서 폭스바겐 차량도 발견됐다.
최훈민·김상훈 기자 jipchak@ilyo.co.kr
남의 휴대폰 쓰고 블랙박스 떼고…치밀한 계획 범죄? 현재까지 알려진 A 양 살해 추정 장소는 서울 중랑구 망우동의 이 씨 자택이다. 하지만 이 씨 부녀가 붙잡힌 곳은 서울 도봉구 도봉동의 한 빌라였다. 경찰은 이 씨가 수사망이 좁혀지자 지난 3일 이곳을 마련해 도피처로 썼다고 봤다. 이 씨는 도피처를 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치밀성을 보였다. 도피를 도운 혐의로 이 씨와 함께 경찰에 구속된 지인 박 아무개 씨(36)의 휴대전화를 사용해 월셋방을 구했다. 이 씨의 치밀함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이 씨는 지난 1일 오후 영월로 향하며 차량에 달렸던 블랙박스를 제거한 뒤 나중에야 다시 설치했다. A 양을 살해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동영상으로 남기기까지 했다. 경찰에 따르면 이 씨는 A 양 유기 직후인 2일 딸과 함께 차 안에서 “내가 자살하려고 준비한 약을 먹고 숨졌다”는 동영상을 촬영했다. 이 양은 “30일 오후 2시쯤 A 양과 놀다 헤어졌는데 그 이후 전화가 끊겼다. 가출한 것 같다”는 문자 메시지를 지난 1일 친구에게 보냈다. 경찰은 이 씨가 딸에게 거짓말을 종용해 알리바이를 만들었다고 봤다. 또한 이 씨가 딸을 이용해 A 양을 자택으로 오게 만들었다고 내다봤다. 경찰은 이 씨가 수면제를 먹은 시점도 검거되기 직전이라고 추정했다. 도봉동 은신처에 숨어있다가 경찰이 수사망을 좁혀 오자 딸과 함께 수면제를 복용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경찰이 이 씨의 은신처로 들이닥친 시간과 소방관이 문을 연 시간 사이에는 20분~30분 여유가 있었다. 당시 문을 열었던 수락119안전센터 관계자는 “신고 접수를 받은 시각은 5일 오전 10시였다. 문 잠겨 있어서 문을 따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10시 31분에 이 씨 부녀를 서울의료원으로 이송했다”고 말했다. [최] |
‘어금니 아빠’로 불린 사연은? 거대 백악종 유전…딸 살리려 모금 활동 이 씨 부녀가 앓고 있는 병은 ‘거대 백악종’으로 치아와 뼈 사이에 악성 종양이 계속 자라는 희귀 병이다. 주기적으로 입 안의 종양을 제거하지 않으면 기도 등이 막혀 사망에 이르게 된다. 완치할 수 있는 치료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거대 백악종은 인종에 상관없이 걸리는 병이다. 이 가운데 ‘유전성’ 거대 백악종은 환자가 극히 드물다고 알려졌다. 이 씨가 지난 2007년 출간한 <어금니 아빠의 행복>에 따르면 이 병에 걸린 환자는 세계적으로 단 6명만 보고됐다. 이전까지는 유전학적 보고도 없었던 희귀 질병이다. 계속 자라는 종양을 제거하려면 뼈를 뽑아내고 다른 부위의 뼈를 이식하는 방법 외에 특별한 치료법도 없는 실정이다. 치통의 10배 정도 되는 고통 역시 감내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종양 제거 등 각종 수술을 최소 20년 동안 지속적으로 받아야 한다고 알려졌다. 수술비용은 7억 원에서 10억 원가량 든다. 지난 2006년 이 씨는 자신과 똑같은 병을 갖고 태어난 딸을 살리려 애쓰는 모습을 한 방송에서 공개했다. 당시 방송에서 이 씨는 이 병으로 턱뼈와 잇몸을 제거했고 어금니가 한 개만 남은 상태라고 밝혔다. 딸에게도 유전된 사실도 함께 화제가 됐다. 이 씨가 이른바 ‘어금니 아빠’로 불리게 된 계기였다. 이 씨 부녀의 사연이 세간에 알려진 뒤 이 씨는 홈페이지 운영과 희귀병 환자의 삶을 책으로 펴내는 등의 방법으로 후원금을 모금해 왔다. 지난 2009년엔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과 로스 앤젤레스 한인 타운 등에서 딸이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가면을 쓰고 전단을 뿌리며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 씨 딸의 경우 이 씨에게 유전돼 거대 백악종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해졌다. 반면 이 씨의 부모는 관련 병이 없었다고 알려졌다. 이와 관련 한 치과 전문의는 “유전이라는 게 세대를 건너뛰기도 하기 때문에 증상이 바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라며 “과거 의료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병에 걸려 일찍 죽기도 하고 그런 병이 있었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고 덧붙였다. [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