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홍문과 방화수류정. 화홍문은 수원 화성의 두 수문 중 북수문에 해당한다. 연합뉴스
경기도 수원에 있는 화성은 정조가 부친인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를 옮기면서 신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1796년에 세운 성곽이다. 전체 둘레는 5.74㎞로, 높이 4~6m의 성벽이 130㏊ 면적의 넓은 땅을 에워싸고 있다.
화성의 축성 과정에는 이전의 여느 성과는 달리 전통적인 축성 기법에 동서양의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그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다. 정약용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해서 만든 <성화주략>(1793)을 축성 때 지침서로 활용했으며, 거중기, 녹로(도르래 기구) 등 건축을 위한 새로운 기계를 고안해 커다란 석재를 옮기고 쌓는 데 이용했다. 정약용의 저서 <경세유표>의 다산 연보에는 당시 거중기 설계도인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어 올려서 축성 비용 4만 냥을 절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조실록’ 정조 20년(1796) 11월 9일자에 따르면 화성을 세우는 데 든 비용이 거의 80만 냥이었다고 하니, 거중기를 만들어 총 공사비의 5% 이상을 절감한 셈이다.
축성 당시 화성 안에는 화성행궁, 중포사(성 밖의 위험을 성 안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던 곳), 사직단(국왕이 국태민안을 빌며 제사를 지내던 곳) 등 많은 부속 시설물이 건립됐다. 하지만 전란으로 대부분 소실돼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만 남았다(현재의 화성행궁은 1단계 복원을 거친 것이다). 화성 성곽 또한 축조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일부가 파손됐으나, <화성성역의궤>에 의거해 보수·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성성역의궤>는 정조의 지시에 따라 성을 세운 전말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책으로 축성 계획, 동원 인력의 인적사항, 재료의 출처 및 용도, 시공 기계, 재료 가공법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당쟁에 휘말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 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효심이 깊던 정조는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침을 당시 조선 최대의 명당으로 꼽히던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고 화성을 축성했다. 이 사도세자의 무덤이 바로 현륭원이다. 정조는 능침을 옮긴 이후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승하하기 직전까지 11년간 모두 13차례나 화성으로의 능행을 거행했다.
장안문. 수원 화성의 정문이다.연합뉴스
역사학자들은 정조의 능행이 그의 남다른 효심에서 출발된 것이지만, 당파 정치를 근절하고 화성을 정치의 중심지로 삼아 강력한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그의 원대한 포부가 담긴 행보이기도 했다고 해석한다. 실제로 정조는 능행을 하면서 군사훈련을 겸하고, 행로의 마을 곳곳에 들러 민생을 살펴보며, 화성에서 특별 과거시험을 정기적으로 치러 신도시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특히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침을 옮기고 화성을 지을 때 백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는데, 이는 백성을 아끼는 마음과 함께 신도시 화성이 원성이 없는, 희망의 땅이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할 때 내탕금(왕실 자금) 1만 냥으로 묘터 부근 땅을 시세의 4배로 사들이고, 이사 자금도 따로 줬는가 하면, 성을 지을 터 때문에 한 마을을 철거하려 하자 이를 막기도 했다. 정조 18년(1794) 1월 15일자 기록을 보자.
“지금 깃발을 꽂아놓은 곳을 보니 성 쌓을 범위를 대략 알겠으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인가를 철거하자는 의논은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다. (중략) 이 성을 쌓는 것은 장차 억만 년의 유구한 대계를 위해서니 인화(人和)가 가장 귀중한 것이다. 어찌 이미 건축한 집을 성역(城役) 때문에 철거할 수 있겠는가.”
정조는 화성을 쌓을 때 신하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부역(보수 없이 의무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노역)에 동원하는 것을 막았다(정조 18년 5월 22일). 그 대신 품팔이 인부들을 모집해 노역을 하도록 했다. 한창 공사가 진행 중일 때 무더위가 찾아오자 힘들어 할 일꾼들이 걱정돼 새로 연구해 처방한 척서단(속이 타거나 더위 먹을 때 먹는 약) 4000정을 공사 현장에 내려주기도 했다(정조 18년 6월 28일). 요즘처럼 불볕더위가 이어질 때는 아예 여러 차례에 걸쳐 “서늘해질 때까지 공사를 중지하라”는 특단의 지시를 내렸다. 그 누구보다도 화성이 빨리 세워지기를 바라면서도, 국가의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를 결코 잊지 않았던 정조. 우리에게 화성이 더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사람을 귀히 여기는 정신과 가치가 깃든 성이기 때문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