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 내부에서는 “이제 투항하고 나가자”며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을 대놓고 외치는 세력이 제법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른정당의 또 다른 최대 주주인 김무성 의원조차 “이제 합칠 때가 됐다”는 말을 흘릴 정도로 바른정당의 운명은 바람 앞 등불이다. 성 바깥에서는 “투항하면 너그러운 큰집 형님(자유한국당)이 다 품어줄 것”이라는 소리가 연일 고성능 스피커를 통해 성벽을 때린다. 당 내부 동요는 최고조에 달한 형세다.
유 의원은 ‘자강론’을 주장하며 바른정당이 홀로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동조하는 당내 의원들은 손에 꼽을 정도다. 마지막 남은 카드는 국민의당과의 전략적 제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유 의원은 10월 10일 대선 후 처음으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공개적으로 마주한 자리에서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추구하는 원칙과 가치가 맞는다면 협력할 준비가 언제든지 돼 있다”고 했다. 러브콜을 보낸 셈이다. 2017년 가을, 대한민국 정치판이 요동치고 있다.
9월 29일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이 서울역을 찾은 모습. 이종현 기자
# 바른정당, 한겨울을 맞다
바른정당 내부는 글자 그대로 사분오열이다. 정당의 최대 잔치라고 할 수 있는 전당대회가 임박했지만 축제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괜히 왔죠. 말하면 뭐해요. 내 판단이 틀렸지. 모두 말릴 때 그 말을 들어야 하는데…. 지금 큰집(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도 내 자리는 없을 테고, 설사 당이 간판을 유지한다고 해도 내년 지방선거에서 이기겠어요?” 큰집을 떠나 바른정당으로 건너왔던 한 선출직 지방의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지방의원의 얘기처럼 바른정당 내부에서는 “이제 더는 안 되겠다”는 목소리가 분출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감안한 듯 바른정당 중진의원들은 자유한국당 중진의원들과 10월 11일 만났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양당 합당을 넘어 보수세력 대결집을 위한 ‘보수대통합 추진위원회’(통추위)를 구성하기로 했다. 통추위 출범 시점을 구체적으로 못 박지는 않았지만 실무추진단부터 꾸려 물밑 작업에 속도를 내기로 했다.
이철우 자유한국당 최고위원과 함께 이 모임을 공동주도한 김영우 바른정당 의원은 “지도부에 정식으로 대통합 실무추진단을 구성하자는 안건을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원은 “당 밖의 보수세력도 함께 통합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는 인식을 공유했다. 외부에 문호를 열기 위한 방안도 만드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언급, 통추위가 두 보수야당을 포함해 외곽 보수세력도 한데 아우르는 ‘보수 빅뱅’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는 의지를 내비쳤다.
이날 모임에는 한국당 11명, 바른정당 4명 등 모두 15명의 3선 의원이 참석했다. 이는 앞서 9월 27일 열린 1차 모임 때보다 3명이 늘어난 것으로 통합의 기운이 점차 무르익어가는 신호라고 정치권에선 해석하고 있다.
# 무대, 자강파 설득 작업 중
유 의원과 함께 바른정당 최대주주로 불리는 김무성 의원조차 “자유한국당과의 통합을 위한 당내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말을 본격적으로 내놨다. 역시 통합파로 불리는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도 ‘보수 대통합’에 대한 의견 개진을 더 이상 아끼지 않는다. 추석 민심을 확인한 결과, 대의명분이 충분해졌다는 것이다.
김무성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자유한국당의 출당 조치 시도가 본격화된 만큼 이제 바른정당이 결단해야 할 때”라는 입장이다. 북핵 위기 및 문재인 정부의 좌파 포퓰리즘에 맞서고, 지방선거 필패를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수우파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이 김 의원의 생각이다. 그는 유승민 의원 등 당내 자강파에 대한 설득 작업도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은 10월 11일 원외위원장 20여 명과 오찬회동을 갖고 통합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본격적인 통합 행보에 나선 상태다.
당대표 권한대행을 맡으며 실질적으로 원내교섭단체인 바른정당을 이끌고 있는 주호영 원내대표도 “민심을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정치는 국민의 동의와 지지를 등에 업고 하는 것인데 지지자들이 원하는 방향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이다.
보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대구경북(TK)이 지역구(대구 수성을)인 주 원내대표는 “추석 연휴 동안 지역구의 전통시장과 경로당, 목욕탕 등을 방문하고, 팔공산 동화사 승시축제 등에 참석하며 현 시국상황과 바른정당의 진로에 대해 많은 분의 의견을 들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 저렇게 독주하는데 보수정당끼리 싸우지 말고 무조건 통합해 일사불란하게 대응하라는 요구가 지배적이었다. 바른정당 원내대표이자 당대표 권한대행인 주호영 의원이 보수통합에 적극 앞장 서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 성 밖 압박도 갈수록 거세지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구체적 시기까지 못 박으면서 보수 통합을 압박하고 있다. 바른정당이 11월 전당대회를 열기 전에 통합을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추석 여론을 종합해본 결과, 민심의 대세는 보수통합이며 바른정당이 큰집인 자유한국당으로 돌아오는 길만이 민심을 받아들이는 것이란 게 홍 대표 주장이다.
홍 대표는 11일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바른정당 전당대회 이전에 형식에 구애되지 말고 보수대통합을 할 수 있는 길을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공식적으로 시작해주기 바란다”며 “바른정당이 전당대회를 하게 되면 (보수분열이) 고착화된다. 바른정당 전대 전에 보수대통합을 이루는 것이 국민이 요구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자유한국당은 각종 여론조사 현황에다 모든 의원들이 추석 때 현장 목소리를 취재해온 결과, 이 시기에 바른정당을 몰아붙이는 것이 최선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읽힌다.
좀처럼 여론조사결과를 믿지 않던 홍 대표는 리얼미터 여론조사(지난 8∼9일 성인 1047명을 상대로 실시.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포인트)까지 내세우고 있다. 그는 20대 젊은층의 자유한국당 지지율이 추석 연휴 직전 4주차 때 9.1%였으나 20.7%로 오른 것을 두고 “고무적”이라고 말하며 보수 대표 정당의 브랜드 이미지를 회복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통합과 관련, 바른정당에 대한 압박 강도를 높이는 이유다.
# 창업주 유승민, 마이웨이 외치다
유승민 의원을 선두로 바른정당 자강론자들은 “바른정당은 홀로 설 수 있다”며 통합은 있을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있다. 전당대회 출마까지 선언한 유승민 의원은 홍준표 대표가 통합 시기까지 못 박은 것과 관련해 “우리 당 전당대회는 우리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며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유 의원은 “자꾸 남의 당 전당대회를 방해하는 이런 행위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영감님은 자유한국당 지지도나 신경 쓰시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홍 대표에 대해 ‘영감님’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양당 중진의원들이 ‘보수대통합 추진위원회’ 구성을 논의한 것에 대해서도 유 의원은 “개인적인 행동일 뿐”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놨다.
유승민 의원을 비롯한 바른정당 자강파는 “국민의당과 손을 잡으면 충분히 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당과의 사안별 협조, 즉 정책연대를 통한 이른바 전략적 제휴 전술을 쓴다면 개혁 보수를 내세운 바른정당이 충분히 ‘계속 정당’으로서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바른정당과 국민의당 의원들로 구성된 ‘국민정책포럼’은 10일 첫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선거구제 개편을 고리로 정책연대에 드라이브를 거는 중이다. 이 모임에 참가한 바른정당 의원은 다수가 자강파 또는 통합에 적극적이지 않은 중도파들이며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도 이날 참석, 대선 후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유승민 의원과 마주했다.
유 의원은 토론회 후 기자들을 만나 “안보 이외의 부분은 (국민의당과) 협력할 게 많다고 생각한다”며 전략적 제휴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바른정당 자강파들은 국민의당과의 국민정책포럼을 기반으로 한다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바른정당·국민의당 후보 단일화도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정책연대에다 선거연대까지 가능하다면 바른정당이 굳이 자유한국당으로 되돌아가야 할 일이 없고, 독자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국민의당은 급할 게 전혀 없다는 입장이다. 다당제 체제를 굳혀야 하는 국민의당으로선 바른정당이 원내 교섭단체로 남아있는 것이 더 유리할 수도 있다. 선거구제 개편에서 다당제 체제에 유리한 중대선거구제 도입 등을 할 때 바른정당이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당 한 관계자는 “원내 제3, 4당이 협력해 선거구제 개편과정에서 서로 돕거나 내년 지방선거에서 공천 협력을 한다는 것은 예측 가능한 좋은 모델이다. 그러나 지금 현재 구도를 봤을 때 바른정당이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심력, 즉 통합파들의 거센 목소리를 통제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다. 바른정당이 내부에서 일어난 다툼을 잘 봉합해 전당대회까지만 간다면 그때 가서 국민의당이 유불리를 따진 뒤 제휴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는 철저하게 상황논리와 셈법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