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버드 대표 김버드 씨가 새롭게 단장한 무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1995년 오픈한 프리버드는 홍대 라이브클럽 문화를 최초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물론 지금 흔히 말하는 ‘클럽문화’가 아닌 밴드의 라이브 공연이 주였다. 덕분에 넥타이부대도 퇴근 후 클럽을 즐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화려했던 프리버드도 홍대 클럽 문화의 대변혁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았다. 2000년대 초반 밴드 중심 라이브 클럽의 ‘듣는 문화’가 DJ 중심 클럽의 ‘춤 문화’로 변했기 때문이다. 프리버드를 이끌어온 ‘김버드’ 씨(본명 김한택)도 우여곡절 끝에 2007년도에 문을 닫았다. 김 씨는 프리버드를 접고 ‘FB 소울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작게 다시 시작해 주로 순수 아마추어 인디 밴드들을 무대에 올렸다.
이렇게 작아진 프리버드가 다시 제대로 돌아왔다. 지난 2007년 이후로는 10년 만이다. 지난 7월부터 새로운 보금자리를 구해 재정비를 했고 체리필터가 오프닝 무대를 장식했다. 그 사이 높아진 임대료에 메인이 아닌 신촌 창천동까지 나와야 했지만 김 씨는 행복해했다. 지난달 죽을 때까지 프리버드를 운영하고 싶다는 김 씨를 프리버드 공연장에서 만났다.
―2007년 프리버드를 접은 이유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다. 얼마 지나지 않아 FB 소울하우스를 열어서 더욱 그런 반응이다.
“우여곡절이 있었다. 여러 이유로 매각했다. 사업하는 동생이 ‘형 그냥 하나 해라’고 하며 공연장을 내줬다. 비슷한 동네인데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어서 FB 소울하우스로 이름을 지었다. 공연장이 작아 이름 있는 밴드를 부르기 뭣해서 주로 순수 아마추어 인디 밴드를 무대에 올렸다.”
―처음 클럽을 운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처음엔 80년대에 레코드를 가장 많이 판, ‘광화문 음악사’라는 레코드숍을 했다. 레코드 회사를 하고 싶어 연 게 70년도였다. 그때가 우리나라 팝 문화가 들어오는 시대였다. 빌보드 차트가 유행하고 DJ들도 차트에 나오는 음악만 틀어서 갑자기 우리나라 음악보다 팝을 더 선호하게 됐다. 젊은 친구들이 가요를 들으면 무시하고 그럴 때가 있었다. 맨 처음에는 미아리에서 시작해 광화문으로 진출했다. 그러다 비틀스를 발굴한 게 레코드숍 사장이라는 점에서 영감을 얻어 나도 우리나라 밴드를 발굴하고 싶었다. 그때는 우리나라에 클럽이 하나도 없을 때라 다들 미8군에서 음악을 할 때였다. 그 외에 음악 하는 자리라고는 나이트클럽 백 반주밖에 없었다. 80년도에 레코드숍과 함께 클럽을 운영했지만 밴드가 없으니까 유지하기가 어려워 접었다. 곧 이탈리아 말로 하얀 집이라는 뜻의 최초 음악 카페 ‘카사비앙카’를 냈다. 그 이름으로 1년 정도 하다가 건물주하고 마찰이 생겨 또 접었다. 쉬다가 경복궁 전철역에 조그만 뉴에이지 레코드를 냈다.“
―다시 레코드숍을 열었는데 어땠나.
“당시 <아들과 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 음악 삽입 곡 중 에버그린이라는 노래를 골라서 삽입해서 대히트를 쳤다. 모래시계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이상하게 나는 돈하고는 인연이 없더라. 같이 했던 드라마 음악 하는 친구가 나를 따돌리고 레코드 사장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다 형이 조금 도와줘서 95년도에 프리버드 클럽을 하게 됐다.”
프리버드 공연장 내부. 뒤로 김버드 씨가 음향을 만지는 곳이 보인다.
―프리버드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나.
“미국의 ‘레너드 스키나드’라는 밴드의 노래 제목이다. 제목이 너무 좋아서 결정했다. 예전에 운영한 카사비앙카도 노래 제목이다. 프리버드 시작하면서 이름도 김버드라는 예명으로 바꿨다.
―프리버드는 경복궁, 광화문과 달리 홍대 쪽이다.
“당시에 여유가 있이 하는 게 아니라 형이 도와줘서 하게 된 건데, 신촌,대학로 괜찮은 곳에 여기저기 가보니깐 너무 비싸서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힘들었다. 당시에는 홍대가 그나마 제일 싸서 하게 됐다. 처음에는 공연에 외국사람만 100% 왔다. 동네에 알리려고 봄, 가을에 페스티벌도 했다. 다행히 빨리 알려진 건 당시에 무가지 잡지 <인 서울 매거진>, <페퍼즈> 등에 엄청 소개됐다. 나중에 광고도 몇 번 내니까 기자도 오게 됐다. 또 홍서범 씨가 DJ 할 때인데, 저와 친한 라디오 작가인 친구가 홍서범 씨를 데려왔다. 홍서범 씨가 친한 밴드를 모아 프로젝트 공연을 하면서 입소문을 탔다.”
―결정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는 뭔가.
“‘산울림’이 입소문을 듣고 와서 프리버드에서 재결합 콘서트를 열며 터졌다. 김창완 씨가 예능, 테마 극장 등에 나올 때인데 김창완 씨가 나오는 장면을 프리버드에서 찍기도 했다. 매스컴을 타면서 나중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틸 하트’도 내한 공연했다. 알려지다 보니까 밴드가 모이고 형, 누나, 오빠가 와서 보다가 밴드도 만들어졌다. ‘미운오리새끼’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자우림’, ‘델리스파이스’, ‘언니네 이발관’, ‘체리필터’도 그렇게 오게 됐다.”
―홍대 클럽 문화를 최초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매스컴을 많이 탄 게 컸다. 대중음식점 허가를 받아 영업했는데 공연하는 게 불법이었다. 그래서 벌금도 많이 냈다. 계속 기자들이 오면서 ‘이런 데가 무슨 불법이냐. 건전한 공간이다’는 민원이 구청에 올려져서 2000년도에 대중음식점 공연이 합법화되기도 했다.”
―프리버드가 유독 돋보였던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런 클럽 문화가 처음이라는 점이 컸다. 또 교회에서 드럼하던 친구가 밴드를 만들어 오기도 했다. 음악이 좋아서 집에서 연습하다가 프리버드가 생겨 ‘저기서 공연하자’고 급조해서 만들어 오기도 하면서 붐이 일어났다. 97년부터 본격적으로 알려져 2002년까지가 전성기였다. 그때는 아마추어도 200명 정도 채워놓고 공연했다. 그러다가 이거다 싶어 다른 곳에서 우후죽순처럼 클럽을 차리다 보니까 오히려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클럽이 없는 불모지에 클럽을 차릴 생각은 어떻게 했나.
“나는 안 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또 잘 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그냥 좋아서 했다. 이건 내 운명이고 이 자리는 내 자리라고 생각하면서 했다. 좋아서 하다 보니깐 월드컵 끝나고 내리막으로 접어들면서 돈 한 푼도 없이 빈털터리로 일주일을 보낸 적도 있다.”
―그런 프리버드를 없앤 데는 이유가 있었을 텐데.
“투자자들과의 복잡한 사정 때문이었다. 나는 돈하고 상관없이 운영만이 중요하지만 투자하는 사람은 돈이 나와야 하잖나. 그런 상황이다 보니까 투자받은 부분을 정리하다 넘어가게 됐다. 그래서 없어진 건 아니고 다른 친구들이 인수해갔다. 다행이라면 투자자들은 투자한 돈은 겨우 받아가게 됐다는 점이다.”
―2007년도에 차린 FB 소울하우스 운영은 어땠나.
“계속 내 돈 써가면서 운이 좋게 여태까지 끌고 왔다. 운영비가 엄청 저렴한데도 관객이 안 오니까 힘들더라. 올해 6월 말까지 했다. 10년 채우고 7월부터 이곳으로 새로 왔다.”
―새롭게 제대로 다시 차린 배경이 있다면.
“작게 하던 곳에서 나가라고 해서 다른 곳을 찾아봐야 했다. 마침 나도 제대로 된 공연장으로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제대로 된 공연장을 갖추니 밴드 동아리 등 아마추어 대관 문의가 들어오면서 오히려 적자에서도 벗어났다. 대관을 해주면서 원하는 공연, 엄선된 밴드만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됐다.”
―지금까지 끌고 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경제적인 부분이다. 내가 박근혜 전 대통령하고 동갑(만 65세)이다. 그래도 이 나이에 죽이 됐건 밥이 됐건 내가 좋아하는 젊은 친구들이 음악하는 데 도움주는 역할이라는 것, 그 자체에 행복하고 자부심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대학에 실용음악과 하나 없었다. 그래도 만날 좋았다. 꽉 채워놓고 공연하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생각했던 것 다 이뤄졌다. 좋은 점, 나쁜 점이 있지만 나쁜 점은 돈 못 버는 거 말고는 없었다.”
―요즘 밴드 인기가 예전만 못한 것 같다.
“요즘은 지나치게 자작곡 위주다. 그러니까 관객도 모르는 곡이라 호응이 적고, 나조차 재미가 없다. 좋은 명곡을 카피를 해야 발전한다. 곡은 갑자기 떨어지지 않고 다른 음악에서 영감 얻어서 만들어진다. 유명 밴드들 보면 명곡을 수없이 카피하다가 자기 것을 만드는 식이다. 요즘 유명한 밴드도 음악도 중요하지만 고전을 제대로 공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뜨는 밴드 중에는 유명한 명곡을 참고한 밴드가 많다. 공연장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유명한 명곡을 하면 하면 관객들도 좋아하고 모르는 자작곡 연주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니까 무대에 오르는 밴드가 자작곡을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지난 7월 프리버드에서 ‘체리필터’의 공연을 봤다. 여느 클럽과 달리 술은커녕 음료수 하나 안파는 점이 독특했다.
“술을 팔면 사람 한 명을 써야 한다. 쓰면 이득이 나야 하는데 그걸 계산하는 게 복잡해서 그냥 티켓만 판다.”
새로운 프리버드의 오프닝 무대는 체리필터가 맡았다.
“페이를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냥 와서 한 번 해주는 느낌으로 진행했다. 손스타를 당구장에서 우연히 봐서 ‘우리 클럽 공연장을 옮겼는데 체리필터가 오프닝으로 하면 좋겠다. 어떻게 해줄 수 없냐’고 했더니 흔쾌하게 수락했다. 그래도 페이가 중요해서 며칠 더 페이를 고민했는데 알아서 달라고 하더라. 사실 안 해주는 친구들이 더 많기 때문에 고마웠다. 공연에서도 ‘바로 앞에서 봐서 너무 좋았다’, ‘만날 좀 세워달라’고 얘기를 많이 해줬다. 공연 보는 매너도 좋았고 밴드도 너무 잘했다. 너무 더운 것 빼고는 아름다웠다.”
―체리필터 공연 음향을 만지면서 너무 흐뭇하게 보더라.
“좋아서 하는 거니깐 즐긴다. 즐기지 못하면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음악하면서 ‘힘들다’ 이런 소리하면 나한테 혼난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데 그럴 거면 다른 것을 하지. 무대에서 노래 1~2곡 부르면서 힘들다 그러면 ‘힘들면 빨리 내려오라’고 한다. 예를 들어 폴 매카트니는 내한 공연에서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한 3시간을 주구장창 물 한잔도 안마시면서 계속 공연을 하더라. ‘무대에 올라오니깐 피곤한데도 힘이 난다’는 식으로 반응을 보내야지, 공연을 보고 있는데 힘들다고 하면 관객이 위로해줘야 하는 건 아니잖나.”
―홍보는 어떻게 하나.
“유명한 밴드는 인터파크에서 하고 본인 사이트에 일정이 나오니까 입소문이 난다. 페이스북에도 올린다.”
―언제까지 하실 생각인가.
“딱히 생각한 적은 없는데 70살까지는 가보고 그때 가서 생각하려고 한다. 앞으로 만 5년 정도 남았다.”
―새롭게 열면서 힘든 점은 없나.
“힘든 건 없다. 너무 좋다. 그냥 건강하게, 열심히, 하는데까지 했으면 좋겠다. 바람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좋은 밴드를 발굴해서 같이 해외공연 다니는 거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