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장기신용은행에 입행한 허 내정자는 1999년 국민은행과 장기신용은행이 합병하면서 국민은행원이 됐다. 그는 국민은행 여신심사본부 집행본부장, 경영기획그룹 대표를 거친 ‘영업통’으로 알려졌다. 지난 8월에는 신한은행으로부터 경찰공무원 전용 상품인 ‘무궁화 대출’ 사업권을 가져오는 성과를 올렸다.
허 내정자가 국민은행에 기여한 바가 적지 않음에도 금융권에서는 의외라는 반응이 나온다. 당초 차기 국민은행장으로는 윤종규 회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이홍 국민은행 부행장과 윤웅원 국민카드 사장이 거론됐다. 이밖에 박지우 KB캐피탈 사장과 김옥찬 KB금융 사장, 양종희 KB손해보험 사장도 유력후보로 꼽혔다. 허 내정자도 후보군에 포함되긴 했지만 그다지 주목받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허 내정자는 비주류 인사로 분류된다. 박지우 사장을 비롯한 대부분 후보는 2001년 통합 국민은행이 출범하기 전의 옛 국민은행 출신이다. 반면 허 내정자는 옛 국민은행이나 주택은행 출신도 아니고 국민은행이 스카우트한 인사도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금융권 관계자는 “그간 후보로 거론됐던 인사들 중에서 자기 색깔이 강한 것으로 평가받는 사람도 꽤 있다”며 “하지만 허 내정자는 상대적으로 자기 소신이 옅다는 평가를 받아 윤 회장이 국민은행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전했다.
차기 국민은행장 후보로 내정된 허인 국민은행 부행장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점으로 출근을 하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2014년 11월 취임한 윤 회장은 그간 ‘KB사태’의 여파로 국민은행장을 겸해왔다. KB금융으로서는 같은 사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윤 회장과 차기 국민은행장의 호흡이 중요하다. 윤 회장 측근 인사들이 차기 행장으로 거론됐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대놓고 윤 회장의 측근을 국민은행장에 앉히면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KB국민은행지부(국민은행 노조·위원장 박홍배)는 현재도 윤 회장의 연임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윤 회장의 측근이 행장으로 취임하면 노사갈등은 더 심해질 수 있다.
KB금융 이사회는 KB사태를 봉합하고 노사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비주류인 허 내정자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전직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윤 회장이 조직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자기가 쥐고 있었던 걸 일정 부분 내려놓을 필요가 있었다”며 “아직 불안 요소가 남아 있는 KB금융의 불안도를 낮추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KB금융은 특정 계파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 능력만 고려해 허 내정자를 선임했다고 주장한다. KB금융 관계자는 “여러 후보를 두고 평가해 가장 적합한 인사를 선임한 것”이라며 “장기신용은행 출신 직원 수가 적어서 허 내정자가 비주류로 보일 수 있지만 국민은행이 통합한 지도 벌써 20년 가까이 됐기에 출신 성분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계파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신한금융지주(신한금융)와 유사한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신한금융은 2010년 라응찬 전 신한금융 회장과 신상훈 전 신한금융 사장이 경영권을 두고 다툰 일명 ‘신한사태’를 겪으면서 한동안 계파 싸움에 휘말렸다. 이에 신한금융 이사회는 2015년 3월 중립적 인사로 평가 받는 조용병 신한BNP파리바자산운용 사장(현 신한금융 회장)을 신한은행장으로 선임했다. 조 회장은 행장 시절 신한사태를 수습하는 동시에 실적을 끌어올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당시 신한금융 회장이었던 한동우 전 회장과 궁합도 잘 맞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KB금융은 특정 계파를 고려하지 않고 순수 능력만 고려해 허 내정자를 선임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국민은행 내부에서는 여전히 허 내정자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국민은행 내부에서는 여전히 허 내정자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다. 허 내정자가 비주류긴 하지만 윤 회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노조는 지난 11일 성명을 통해 “허 내정자는 영업기획부 승인을 거치지 않고 편법적으로 진행된 프로모션 실태를 묵과하는 등 무분별한 실적주의를 강요한 인물”이라며 “윤 회장의 권력에 대한 견제는 불가능할 것이고 지나친 권력 집중을 방지하기 위해 회장과 행장을 분리해야 한다는 애초의 취지에도 반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허 내정자는 지난 12일 국민은행 노조 사무실을 방문해 박홍배 노조위원장을 만났다. 이날 허 내정자는 “앞으로 노조와 대화하며 현안들을 잘 풀어가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 위원장은 “허 내정자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고 인사 정도만 했다”며 “노조의 입장과 궁금한 사안을 문서로 작성해 허 내정자에게 전달한 상태”라고 전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