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은 유연하고 율동적인 춤과 같은 동작으로 상대를 공격하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한국 전통무술이다. 최준필 기자
택견은 유연하고 율동적인 춤과 같은 동작으로 상대를 공격하거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한국 전통무술이다. 천천히 꿈틀거리고 비트는 유연하고 곡선적인 동작이 때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그 부드러운 움직임 안에는 엄청난 에너지와 힘이 담겨 있다. 숙련된 택견 전수자의 우아한 몸놀림은 한 마리의 학 같지만, 탄력적인 공격 기술은 매와 같이 빠르고 강력하다.
택견이 다른 전투 스포츠와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배려와 상생의 무술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택견은 발모서리나 주먹 같은 강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부위 대신에 장심, 발바닥 같은 부드러운 부분을 주로 사용한다. 전수 과정에서도 경기 중 주도권을 장악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 상대를 배려할 것을 가르친다. 상대를 해치기보다는 스스로 물러나도록 하는 기술을 주로 쓰며, 공격보다 수비 기술을 더 많이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택견의 역사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가 삼국시대 이전부터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는 두 남자가 대련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이 겨루는 동작은 ‘수박’ 또는 ‘수박희’로, 지금의 택견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 택견은 무술로서 더욱 발전해 무과 시험의 한 과목으로 취급됐다. <고려사>에는 훗날 무신정권의 집권자로 등극하는 이의민이 수박희를 잘해 임금인 의종의 눈에 띄었고, 별장으로 승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무신의 난’의 직접적인 또 하나의 도화선이 된 것도 수박희 대결 결과였다. <고려사절요> 경인 24년(1170년) 8월의 기록에는 문신 우대 정책으로 무신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시절, 의종이 무신들에게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戲)를 하라고 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병수박희란 군사 5인이 한 단위가 되어 권법으로 승부를 겨루는 경기다. 이때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에 참가했다 패하자, 젊은 문신인 한뢰가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해 무신들의 분노에 불을 지른 것으로 전해진다.
‘외유내강의 무술’ 택견은 2011년에 유네스크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됐다. 연합뉴스
조선시대에도 수박희는 병사를 뽑는 기준이 될 정도로 널리 수련되는 무술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0년(1410년) 1월 21일자에는 “병조와 의흥부에서 사람들에게 수박희를 시켜 세 사람을 이긴 자로 방패군(防牌軍)을 보충했다”고 기록돼 있다. 세종 1년(1419년) 6월 20일자에는 장사들을 뽑아 수박희를 시키고 상왕과 왕, 그리고 신하들이 관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러 사람 중 빼어난 실력을 보인 ‘해연’이라는 중에게 상을 주고 머리를 길러 환속하게 한 일화가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택견은 궁중에서보다 저잣거리에서 백성이 즐기고 애환을 같이해온 민족무술이었다. 조선의 화가 유숙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대쾌도’라는 풍속화에는, 구경꾼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한쪽에서 열띤 씨름 경기가 펼쳐지고 다른 한쪽에선 도포 자락을 허리에 동여맨 두 젊은이가 택견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택견은 본디 생존을 위한 무술로 수련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 단위의 여가 활동으로 발달하기도 했다. 실제로 택견은 농업 문화의 계절적 전통에 따라, 대보름, 단오, 백중, 추석 등의 민속행사에서 널리 행해지며 공동체 구성원의 결속을 다지는 스포츠로 사랑 받았다. 이는 택견이 ‘상대방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아래 화합과 호혜의 정신을 구현하는 무술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자신보다 상대를, 개인보다 집단을 배려하도록 가르치는 경이로운 스포츠’, ‘모든 연령의 남성과 여성이 쉽게 수련할 수 있는 부드러운 곡선의 무술’인 택견은 그 빼어난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에 등재됐다. 아무쪼록 ‘외유내강의 무술’ 택견에 깃든 ‘배려와 상생’의 정신이 우리 곁에서 오래도록 살아 숨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