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노숙’이 새로운 놀이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입고 움직일 수 있는 침낭 (왼쪽)과 동호회 사람들끼리 모여 노숙을 하는 모습. | ||
하지만 최근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노숙’이 전혀 다른 의미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노숙’이 새로운 유행으로 떠오르는 등 일종의 ‘놀이’가 된 것이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노숙 놀이’는 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도심의 공원이나 길거리, 전철역 등에서 자는 것을 가리킨다.
지난 6월 19일 도쿄 신주쿠의 한 공원에서 ‘노숙의 날’ 이벤트가 있었다. 참가자는 남녀 열두 명. 20대에서 5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고 세계를 일주했다는 모험가부터 우체국직원, 조각가에 이르기까지 직업도 가지각색이다.
사실 이벤트 자체는 별 것이 없다. 각자 가져온 음식을 나눠먹으며 ‘한밤중의 피크닉’을 즐긴 후 각자 침낭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것이 전부다. 메인 이벤트는 어디까지나 밖에서 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은 ‘스트레스 해소’나 ‘기분 전환’ 혹은 ‘그냥 재미있어서’ 노숙을 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매달 세 번은 노숙을 한다는 한 참가자는 “집안이 아닌 야외에서 자면 해방감이 느껴지고,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덥거나 추운 계절감을 느낄 수 있다. 살아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고 노숙 예찬론을 폈다. 지나칠 정도로 안락한 생활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는 편한 집을 두고 밖에서 고생하는 것이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나 놀이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처음에는 극히 일부 마니아들의 취미 생활로 시작됐던 ‘노숙 붐’은 점점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들만의 동호회도 있고 여느 동호회처럼 오프라인 모임도 갖는다. 오프라인 모임이라고 해봐야 도심의 공원 등에서 만나 함께 노숙을 하는 것이지만 버젓이 <노주쿠야로>라는 동호인 잡지까지 있는 진짜 동호회다.
창간된 지 4년된 잡지 <노주쿠야로>는 젊었을 때부터 무전여행과 노숙을 즐겼던(?) 가토 치아키 씨(여·27)가 뜻이 맞는 지인들과 함께 시작한 것으로 현재 제5호가 발매 중이다. 100페이지가 넘는 지면이 거의 노숙 경험담으로 채워져 있는 이색적인 잡지다. 여기에는 본인이 직접 만든 침낭을 가지고 도보 여행을 하거나 노숙자들이 많이 모여 ‘골판지 상자 마을’이 형성된 우에노 공원에서 밤을 보냈다는 등의 무용담이 넘쳐난다.
1호 때 150부였던 발행부수도 지금은 2000부가 넘는다. 그녀는 벌써 노숙 경력 11년의 베테랑으로 지금도 매주 한 번씩 노숙을 하고 있다. 수없이 노숙을 했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위험한 상황에 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가토 씨는 고등학교 때 일본 혼슈를 도보로 횡단하면서 처음으로 노숙의 즐거움에 눈을 뜨게 됐다. 혼슈 북단의 아오모리부터 맨 끝의 시모노세키까지 걸어가는 데 두 달이 걸렸다고 한다. 여고생의 몸으로 2주 이상 씻지도 못하고 공원에서 새우잠을 자는 등 고생도 많았지만 즐거움과 해방감이 더 컸다는 것. 대학에 가서는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홋카이도와 규슈를 걸어서 여행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에 낸 잡지 <노주쿠야로>가 신문이나 TV 등에 소개되면서 지명도도 높아졌다. 그녀의 영향인지 지금은 일부 대학에 노숙 동아리까지 생겼을 정도라고 하니 붐은 붐인 모양이다.
한편 좀 더 차별화된 노숙의 길을 걷는 사람들도 있다. 철도역이나 전철역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STB(Station Bivouac)’가 그것이다. 역 노숙은 야외에서 자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밤이슬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역에 잠을 잘 수 있는 긴 의자나 화장실, 수도시설 등이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노숙보다 쾌적하기 때문에 노숙 애호가뿐 아니라 지갑이 가벼운 여행객들도 쉽게 도전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STB의 회장은 “아직 어딘가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있는 텅 빈 역에서 잔다는 것이 역 노숙의 매력”이라고 말한다. 현재 일본 전역의 노숙 가능한 역 정보를 모은 책
STB 애호자들이 말하는 ‘역 노숙의 법칙’에 대해 알아보자. 우선 막차가 나갈 때까지 잠들어선 안된다. 역을 이용하는 승객들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방한 대책도 확실히 해야 한다. 특히 겨울에 노숙을 할 경우 침낭이나 휴대용 손난로 등이 필수다. 또한 첫차가 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 한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더라도 승객들이 역으로 들어오기 전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 노숙인의 예의다. 마지막으로 쓰레기를 남겨서는 안된다. 보이스카우트와 마찬가지로 ‘떠난 뒤에 남는 것은 발자국과 추억뿐’이라는 것이 역 노숙의 기본 정신이다.
이와 같은 노숙 붐을 야외활동 전문가는 어떻게 바라볼까. 노숙에 대한 책 <노주쿠타이젠(野宿大全)>까지 낸 후쿠야마 대학의 무라카미 교수는 도심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 “좁고 답답한 곳에 살다보면 탁 트인 공간으로 나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다. 하지만 자연이 아닌 도심에서 노숙을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체온을 그리워하는, 그만큼 외로운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뜻이 아닐까”라고 해석하고 있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