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2일 대낮 옥스퍼드 스트리트에서 한 청년이 시비끝에 칼에 찔려 숨진 현장. | ||
지난 5월 올 가을 개봉될 영화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에 조연으로 출연했던 로버트 녹스(18)가 칼에 찔려 비명횡사했다는 소식에 전세계 영화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한테 칼부림을 당했다고 하니 더욱 놀랄 일이었던 것.
당시 그는 목과 가슴 등 네 군데를 칼에 찔렸으며 그 자리에서 과다출혈로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싸움에 휘말렸던 다른 세 명의 청소년들도 칼에 찔려 부상을 당했지만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녹스를 무자비하게 칼로 찌른 20대 초반의 흑인 남성은 두 자루의 식칼을 들고 범행을 저질렀으며, 범행동기는 며칠 전 술집에서 녹스의 친구가 자신의 휴대폰을 훔쳐갔다며 복수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영국인들에게 녹스의 사망 소식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녹스는 올해 영국에서 칼에 찔려 숨진 10대 청소년들 중 이미 열네 번째 희생자였던 것이다.
녹스의 죽음이 알려지자 대다수의 영국인들은 “또란 말인가. 도대체 정부는 언제까지 칼부림 범죄를 방치할 것인가”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 설문조사에서 영국 성인의 41%는 ‘거리에서 청소년들이 무리 지어 있는 것을 보면 겁이 나서 일부러 길을 돌아간다’고 응답했으며, 25%는 ‘밤에 10대들이 거리에서 서성이는 걸 보면 집밖으로 나가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요즘 청소년 범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여실히 나타내는 대목이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사태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은 10대 청소년들 본인일 것이다. 런던에 거주하는 벤 삭스(14)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 실제 길을 가다가 칼로 위협당하는 경우가 많다. 길을 걷다가 앞에 또래 소년들이 떼지어 오는 걸 보면 본능적으로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고 말했다. 또한 해머스미스에 거주하는 조지 베이츠(16)는 “친구들 중에 또래로부터 협박을 안 당한 친구들이 없다. 오히려 안 당한 게 이상할 정도다. 나 또한 작년에 다섯 명의 무리한테 당했다”고 털어 놓았다. 벤 제다이(15)는 “거리를 다닐 때에는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게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런던에서 산다는 건 긴장의 연속이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청소년들이 이런 범죄를 저지르는 데에는 어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저 휴대폰이나 아이팟 등 소지품을 강탈하거나, 혹은 지나가는 사람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혹은 라이벌 갱단들 간의 세력 다툼 등이 그 이유다.
▲ <해리 포터>에 출연했던 로버트 녹스와 그의 가족들. | ||
얼마 전에는 백주대낮에 그것도 런던에서 가장 번화한 옥스퍼드 스트리트 한복판에서 칼부림이 벌어지기도 했다. 5월 12일 스티븐 빅바이(22)와 친구들은 맥도날드를 나서다가 다른 갱단 멤버들과 우연히 마주쳤다. 이들 사이에는 곧바로 시비가 붙었고, 참다 못한 빅바이가 상대에게 음료수를 끼얹자 바로 난투극이 시작됐다. 이 싸움은 결국 빅바이가 칼에 찔린 후에야 중단됐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지나가던 행인들조차 손을 쓸 겨를이 없었으며, 심장에 정확히 한 차례 찔린 빅바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길 위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런 영국의 현실을 반영하듯 최근 유니세프는 “유럽 국가 중 영국의 청소년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또한 영국 청소년들은 다른 나라 청소년들보다 술을 더 많이 마시고, 담배도 더 많이 피우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성년자의 임신 비율도 유럽 국가 중에 최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자연히 14세 미만 소녀들의 낙태율도 지난해보다 21% 증가했다.
이에 대해 브라이튼 대학의 피터 스퀴러스 범죄학 교수는 “영국 부모나 사회가 비행 청소년들을 너무 채찍으로만 다스리는 데 따른 부작용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벌이 아니라 따뜻한 관심과 올바른 지도”라고 말한다.
날로 급증하고 있는 이런 범죄에 대한 책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영국 정부는 최근 ‘칼부림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런저런 해결책을 내놓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지난 6월부터는 칼을 소지하고 있다가 적발되면 처벌되는 연령을 기존의 18세 이상에서 16세 이상으로 하향 조정했으며, 적발될 경우에는 최대 4년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학교나 펍, 클럽 등에 금속 탐지기를 설치해서 검문을 실시하는가 하면, 3000만 파운드(약 600억 원)를 들여서 흉기 소지 위험을 경고하는 광고 캠페인을 시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은 그 효과가 미미한 듯 보인다. 잦은 불시검문으로 오히려 청소년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가 하면, 지난 5년 간 청소년 범죄는 되레 60%가량 급증했다.
또한 범죄율이 급증할수록 호신용으로 칼을 소지하고 다니는 청소년들도 덩달아 늘고 있다는 것도 문제다. 많은 10대들이 “언제 어디서 공격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칼 없이 집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다”고 토로하고 있다. 하지만 자기 방어를 위해 칼을 소지한다고 해도 이로 인해 또 다른 범죄의 가능성이 커지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영국 정부가 이번 난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주목된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