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대표와 박지원 전 대표 간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이종현 기자.
한때 야권발 정계개편에서 최상의 조합으로 평가받았던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이다. 이들의 교집합은 ‘판을 흔들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판의 대상이나 범위는 다르다. 안 대표는 날 선 창을 이끌고 기존 정계개편 허물기에 나섰다. 국정감사 이후로 미뤄진 보수대통합은 일시에 흔들렸다. 귀향을 꿈꾸는 당내 호남파도 허를 찔렸다. 국민의당 비밀 여론조사 결과가 10월 18일 공개되자, 도미노 정계개편이 요동친 셈이다.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의당·바른정당’ 통합의 압승이었다. 당 산하 싱크탱크인 <국민정책연구원>이 10월 13일과 14일 이틀간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자세한 사항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결과, 국민의당·바른정당 통합당(19.7%)의 상승 폭은 양당의 지지도 합산보다 6.5%포인트 높았다.
각 당의 지지도는 민주당 49.3%, 한국당 15.0%, 바른정당 6.8%, 국민의당 6.4%였다. 안 대표와 바른정당 자강파는 중도보수통합의 문을 열어놓은 상태다. 자유한국당·바른정당 통합당(26.3%)은 4.5%포인트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박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호남계가 주장하는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통합당(54.6%)은 양당의 단순 지지도 합보다 1.1%포인트 낮았다. 시너지 효과는커녕 되레 마이너스인 셈이다. 여론조사대로라면 국민의당과 바른정당 통합당이 출범할 경우 한국당을 제치고 2위로 부상할 가능성이 한층 커지게 됐다.
국민의당 내부는 흉흉했다. 특히 당 산하 제2창당위원회의 시·도당위원장과 지역위원장의 전원 사퇴 추진과 맞물려 파장이 커지고 있다. 호남파 내부에서는 안철수계가 바른정당 자강파와의 연대·연합, 더 나아가 통합 밑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특정 정파의 의도가 담긴 여론조사라는 얘기다.
안 대표는 10월 18일 ‘비밀 여론조사’ 결과와 관련해 “여러 이합집산 이야기가 난무해 민심 파악 차원에서 여론조사를 했다”며 “다당제가 유지돼야 한다는 것이 민심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즉각 “왜 불필요한 일로 당의 전열을 흐트러지게 하는가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날을 세웠다. 여론조사 결과로 한층 고무된 안 대표를 박 전 대표가 제압에 나선 모양새다.
앞서 이들은 도미노 정계개편이 일 때마다 충돌했다. 안 대표는 10월 12일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민주당과의 통합론에 대해 “그건 옛날 이념정당 중심의 사고방식”이라고 당내 호남파에 경고장을 날렸다. 이에 박 전 대표는 “소위 자강파와 함께하면 더 큰 손실”이라고 일축했다.
안 대표의 정계개편 흔들기 이후 중도정당 연대·통합론은 속도를 냈다. 김동철 국민의당·주호영 바른정당 대표 권한대행 겸 원내대표는 비밀 여론조사 공개 날 국회에서 전격 회동했다. 양당 지도부가 통합 논의를 위해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안 대표는 추석 전부터 바른정당 자강파 의원과 접촉하며 연대·통합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당대당’ 통합까지는 접근하지 못했지만, 정책연대 및 지방선거 후보연대 등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김 원내대표는 “중도정당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주 대표 권한대행은 “연대·통합에 대해 전반적으로 얘기했다”고 각각 밝혔다. 호남파 일부 의원들은 격분했다. 한 중진 의원은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분개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민주당과 정의당을 제외한 중도보수진영이 ‘조자룡 헌 칼 쓰듯’(물건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의미로 삼국지에서 유래) 승부수를 던지면서 주도권 싸움에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암초는 만만치 않다.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관계 설정은 크게 ▲당대당 통합 ▲정책연대 및 선거연대 ▲공동교섭단체 구성 등으로 나뉜다. 국민의당은 호남파, 바른정당은 보수대통합파 설득이 변수다. 안 대표의 비서실장인 송기석 의원은 10월 20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당 소속 의원 30명이 통합에 찬성한다“며 ”12월에 통합 선언을 해야 한다“고 통합에 불을 댕겼다. 이는 최근 당 지도부가 소속 의원 40명을 대상으로 바른정당과의 통합 전수조사를 한 결과다. 바른정당은 소속 의원 20명 중 10명이 국민의당과의 통합에 긍정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선 정책연대-후 선거연대를 통해 내년 지방선거에서 ‘중도보수 단일후보’ 논의에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북정책에서 극과 극에 서 있는 이들 지지층이 한데 모일지는 미지수다. 또한 선거연대 조합이 ‘반문(반문재인)·반박(반박근혜)’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점도 부담이다. 공동교섭단체 구성도 하나의 카드다. 선례도 있다. 2008년 18대 총선 이후 이회창 전 총재의 자유선진당(18석)과 문국현 전 대표의 창조한국당(3석)의 만남이다. 양당은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선진과 창조의 모임’을 만들었지만, 보수와 개혁을 대표하는 두 당의 연대전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국회법상 규정도 넘어야 할 산이다. 당시 양당은 모두 비교섭단체였다. 국회법상 교섭단체는 한 정당에 20명 이상의 의원이 있거나, 교섭단체에 속하지 않는 정당 또는 무소속 의원 20명이 모여 교섭단체 구성을 신청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20석의 바른정당은 단 1석만 잃어도 교섭단체 지위를 상실하지만, 국민의당은 절반 이상이 이탈해야 한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A 정당이 교섭단체인 상황에서는 또 다른 공동교섭단체의 구성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양당의 실질적 주주인 안 대표와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정계개편과 대선 셈법이 다르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도미노 정계개편이 촉발한 것은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의 원사이드 게임 ▲지방선거에서 여당 독주 예상 ▲한국당의 대안 세력 부상 등이 맞물린 결과다. 현재 각 당에서는 17곳의 광역자체단체장 중 민주당 최소 12곳∼최대 14곳, 한국당 최소 3곳∼최대 5곳을 각각 당선권으로 예상한다. 바른정당은 제주만 백중 우세다. 국민의당은 전멸 상태다. 중도보수통합은 거대 양당 사이에서 생명연장을 위해 고육지책으로 꺼낸 카드라는 얘기다.
여기까지는 공통점이다. 하지만 바른정당은 정당 중심의 정계개편에 방점을 찍은 반면, 국민의당은 개개인에 의존한 정계개편이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바른정당은 정계개편 상황에서도 전당대회를 치르겠다는 입장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당은 당의 진로보다는 안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나, 박 전 대표의 전남지사 출마 여부가 더 관심사다. 정계개편 과정에서 개인의 생존 투쟁을 위해 각자도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유 의원은 그간 내년 지방선거와 차기 총선까지는 독자세력, 그 이후에는 보수대통합이 필요하다는 점을 피력했다. 2022년 대선에서는 보수단일후보로 선거를 치러야 한다는 의미다. 이는 안 대표의 제3당 세력, 다당제 구상과는 다르다.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안 대표와 대구·경북(TK) 등 영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유 의원의 이질성으로, 중도보수통합이 공멸할 수 있다는 분석과 궤를 같이하는 지점이다.
20대 총선을 앞두고 호남발 정계개편의 물꼬를 텄던 박 전 대표의 향후 행보는 당 원심력의 분수령이다. 박 전 대표는 민주당 연정 제안에 대해 “흡수통합으로 비칠 확률이 높다”고 선을 그었지만, 여의도 안팎에선 DJP(김대중·김종필) 연대 모델을 고리로 민주당과 호남파의 교집합 찾기는 여전히 살아있는 카드로 보고 있다.
여당 한 관계자는 박 전 대표의 전남지사 출마 가능성에 대해 “직접 출마보다는 영향력을 극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식 DJP 연정 모델이 만들어진다면, 박 전 대표로선 전남지사보다는 국무총리 등의 차기 내각 참여가 더 매력적인 카드다. 신구 대표의 전쟁은 이제부터다. 이들의 승패가 도미노 정계개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