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친구를 강제추행,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한 이영학.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할 경찰이 미흡한 수사와 초동 수사 실패로 많은 희생양을 만들었다. 연합뉴스
# 단순 ‘가출’로 판단해 놓쳐버린 골든타임
피해자 김 아무개 양의 실종신고가 접수된 것은 9월 30일 23시.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은 다음날인 10월 1일 오전 11시 53분~오후 1시 44분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경찰은 실종신고 접수 후 김 양의 행방조사를 시작했으나 1일 새벽 2시 40분쯤 조사를 중단하고 퇴근했다. 경찰이 조사를 중단한 9시간 후 이영학은 피해자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강제 추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 경찰이 단순 가출로 판단하고 ‘골든 타임’을 놓친 셈이다.
또한 1일 오후 5시 30분, 김 양의 어머니는 지구대에서 이영학의 딸 이 아무개 양과 2분이나 통화를 했고 경찰에게 이를 전했지만 정작 경찰은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다음날인 2일에도 경찰은 이영학의 집을 두 차례 방문했다. 오전 11시에는 집 안에서 인기척이 없고 문이 잠겨있다는 이유로 철수했고, 오후 9시에는 사다리차를 동원해 이영학의 집에 진입했다. 하지만 김 양은 이미 살해돼 시신이 옮겨진 상태였다. 경찰이 뒷북 수사를 한 것이다.
경찰청 예규 ‘실종 아동 등 및 가출인 업무처리 규칙’에 따르면 실종아동 신고를 접수하면 경찰서장은 현장출동 경찰관을 지정해야 한다. 하지만 관할인 중랑경찰서장은 김 양의 실종 사실을 4일 오전에야 보고받았기 때문에 담당 수사관 배정은 한참 뒤에야 이뤄졌다.
그동안 김 양의 친구들은 답답한 마음에 직접 이영학 집 근처와 주위 상점들을 수소문하고 다녔고, 김 양은 이영학의 집에서 살해돼 강원 영월군 야산에 유기됐다. 안일한 경찰의 대응으로 14세 어린 학생이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셈이다.
# “나는 아니다”…범인 말 믿은 경찰
이영학 집을 의심하지 않았듯 경찰은 2010년 4월 김길태를 마주하고도 의심하지 않았다. 경찰은 그해 1월 24일 20대 여성이 납치·성폭행당한 범행 현장인 김길태의 자택 옥탑방에서 그와 마주쳤다. 하지만 “나는 위층에 사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김길태의 말을 믿고 경찰은 현장을 벗어났다.
그리고 한 달 뒤인 2월 24일, 여중생 실종 신고가 들어왔다. 이 아무개 양의 집에 안경, 휴대전화, 점퍼 등이 남겨진 채로 실종됐고 집 안에서는 외부인의 발자국이 발견됐음에도 경찰은 이를 단순 가출 정도로만 판단했다.
2010년 3월 강희락 경찰청장이 김길태 사건에 대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때문에 초기 주변 수색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피해자 이 양의 시신은 집에서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웃집 빈 물탱크 속에서 발견됐다.
이곳은 그동안 경찰이 구조수색 인원 2만 명을 동원해 세 차례나 이미 다녀간 곳이었다. 경찰이 초동수사에 신중을 기했더라면 두 번째 피해자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 피해 여성 신고 무시한 비극
중국 동포였던 오원춘은 2012년 4월, 여성 곽 아무개 씨를 납치해 성폭행하려다 실패하자 살해했다. 살해한 여성 시신을 무려 358조각을 내 검은 봉지에 나눠 담았다는 점에서 가장 엽기적이고 잔인한 수법으로 기록됐다.
당시 오원춘 집에 납치된 곽 씨는 기회를 엿봐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경찰은 곽 씨가 납치된 것을 알면서도 “범인이 누구냐” “자세한 위치가 어디냐”는 등 긴 질문을 이어가며 시간을 끌었다.
2012년 4월 당시 조현오 경찰청장이 ‘오원춘 사건’에 대해 대국미 사과를 하고 사의를 표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곽 씨는 112 신고에서 “지동초등학교에서 못골놀이터 가기 전”, “집안에 있다” 등 구체적인 위치를 알렸지만, 경찰은 ‘집안’을 제외한 학교 운동장 등 엉뚱한 곳만 뒤졌다. 인근 주택가를 수색하면서도 인기척이 있는지 여부만 살피며 소극적으로 수사를 해 ‘부실 대응’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경찰의 신고 녹취록에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라며 비명을 지르는 피해자의 마지막 음성이 담겨 있었지만, 경찰 측이 초기에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이를 은폐한 사실이 드러나 더 큰 비난에 직면했다.
# 성폭행 1시간 동안 구경만 한 경찰
2013년 3월, 경기도 수원시 지동 한 골목에서 한 출장마사지업소 종업원이 112에 신고를 했다. 종업원이 손님 집에 들어갔는데 휴대폰이 꺼져 있어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는 내용의 신고 전화였다.
경찰은 사건 발생 장소에 출동했지만, 범인의 집으로 진입하진 않았고 창 밖에서 성폭행 현장을 1시간 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당시 경찰은 “인질범이나 돌발적인 상황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이유로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이 사건은 오원춘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일어나 많은 비판이 이어졌다.
게다가 이 사건이 오원춘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고작 450m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 단순 ‘판단착오’로 막지 못한 칼부림 살해
박 아무개 씨(여·66)는 2015년 9월 서울 용산구 자신의 자택에서 아들 이 아무개 씨의 여자친구 A 씨와 말다툼을 하다가 A 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당시 아들 이 씨는 어머니 박 씨가 칼을 들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112에 신고했다.
최초 신고 시각은 오후 9시 12분. 하지만 신고를 받은 한남파출소는 10여 분 전 들어온 다른 신고 현장으로 43호 순찰차를 보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42호 순찰차가 출동한 상태였고, 43호 순찰차는 무능하게도 근처에 엉뚱한 택시비 민원 사건을 해결하고 있었다.
이후 43호는 파출소로 복귀하다가 뒤늦게 길에서 소리를 듣고 사건 현장으로 갔지만, 이미 A 씨는 박 씨의 칼에 찔린 상태였고 인근 병원으로 이송된 A 씨는 결국 숨지고 말았다.
경찰은 ‘부실 대응’ 논란에 “두 사건이 모두 가정폭력이고 10분 간격으로 들어왔다. 현장이 60여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주소가 비슷해 같은 사건으로 오인했다”고 해명했다.
# 배상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피해자의 신고 접수를 받고도 안일하게 대응한 경찰과 국가로부터 유가족들은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을까. ‘오원춘 사건’ 이후 피해자 유가족은 국가를 상대로 3억 6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지난해 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 대법관)는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승소 부분을 확대하라는 취지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피해자 사망에 따른 재산상 손해까지 더 폭넓게 배상하라는 취지로 해석된다.
경찰의 유가족 손해 배상은 지난 5년간 22억 원에 달한다. 표=박남춘 의원실 제공
대법원 2부는 “사건 당시 경찰이 피해자의 신고 내용만 제대로 확인했다면 그가 살아있던 시점에서 범행 현장을 발견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경찰의 늑장 대응과 피해자 사망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은 원심의 판단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이 경찰과 112신고센터 근무자들의 허술한 초동 대응과 업무 미숙 때문에 사망 가능성을 인정한 셈이다.
국해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박남춘 의원실에 따르면 이 같은 경찰의 허술한 조치 등 수사 과정의 위법·부당행위로 경찰이 지급한 국가소송 배상금은 지난 5년간 모두 87건으로 액수는 22억 7600만 원에 달한다. 이 배상금 지급에는 ‘오원춘 사건’도 포함됐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