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전 대통령은 “20년, 30년형을 선고해보라”는 투로 자신의 운명을 쥔 재판부에도 노골적 불신을 드러냈다. 형사소송법상 그의 재판은 변호인 없이 진행할 수 없는데도 박 전 대통령은 변호인단을 모두 사임하게 만들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외톨이’ 전략을 통해 재판부가 아닌, 여론을 향해 옥중정치를 시작한 셈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10월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사건 78차’ 공판을 마친 뒤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최준필 기자
이러한 행보가 적폐 청산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문재인 정부를 향한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작용과 합쳐져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태풍을 일으킬 것이라는 분석도 정치권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친박 청산에 나서겠다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에 대해 불신의 눈길을 주고 있는 자유한국당 내 반홍(反洪) 세력이 결집할 수 있다는 해석과도 이어진다. 실제로 자유한국당 최대 주주인 대구경북(TK) 민심은 여전히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완전 절연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남아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 옥중 정치가 미풍에 그칠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국민들의 시야에서 일단 멀어진 박 전 대통령이 쇠창살 속에 있는 한 서서히 잊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Out of sight, out of mind)’, 즉 시야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결국은 떠난다는 논리다. 박 전 대통령과의 절연에 나선 홍준표 대표도 이를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 박근혜 옥중정치, 보수층 민심에 성패
박 전 대통령의 ‘옥중정치’가 힘을 받느냐, 마느냐는 보수층 민심의 향배에 달려 있다. 현재로서는 보수층이 박근혜 전 대통령 법정 발언에 대해 본격적 지지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온정적 성향이 강한 TK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다음은 TK에서 활동하는 한 변호사의 말이다.
“여론을 들어보면 박 전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는 측근에게 속아 국정을 농단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TK지역민들이 여전히 큰 실망감을 갖고 있다. 하지만 TK사람들이 겉정은 없어도 속정이 많은 보수적 성향이어서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다. 앞으로의 변수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TK민심 향배다. 임기 초반 ‘문재인 정부가 그런대로 하네’라는 생각이 TK에서도 많았지만 추석 때 민심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안보 무능, 복지 퍼주기, 대책 없는 최저임금 인상 등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 경영자로서 많이 모자란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새로운 민심 결집이 이뤄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TK의 한 선출직 지방의원은 “탄핵 이후 움츠러들었던 TK민심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핵을 개발하고 미사일을 쏴대는 북한의 행동에 대해 문재인 정부가 단호하지 못하다는 생각으로 인해 민심이 떠나는 중이다. 적폐 청산도 거부감이 강하다. 문재인 정부만이 정의고, 전임 보수 정부는 모두 악의 축이라는 몰아세우기에 대해 강한 반발이 생기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이 이런 정서에 불쏘시개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강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추석 민심을 듣고 온 TK 지역 국회의원들도 이곳 민심이 문재인 정부에 대해 돌아서기 시작했고 TK발(發) 민심 이반은 결국 전국적인 새로운 보수 결집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고 있다. 김상훈 자유한국당 의원은 “북핵 이야기가 지역구 추석 민심의 화두였으나 이렇다 할 대한민국의 대응이 없어 비판적인 여론이 높았다.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도 한미 FTA 뉴스가 나오면서 기업인들 중심으로 민심이 싸늘해졌다”고 말했다.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추석 민심에서 가장 큰 부분은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었다. 안보 대응에 대한 걱정과 나라 경제 거덜 내는 것 아니냐는 우려였다. 특히 인기 영합 위주로 다 퍼주고 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걱정이 많다”고 했다. 정태옥 자유한국당 의원은 “추석에 지역구를 돌아보면서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의외로 많이 떨어졌다는 점을 확인했다. 서민들은 지금 먹고 살기가 너무 어려운데 집권 여당이 전 정부와 전전 정부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하고 있어 실망스럽다는 말이 많았다”고 전했다.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도 “문재인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는 여론이 많았다. 북핵 사태로 우리 국민들 다 죽게 생겼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여론이 높더라”고 말했다. 최교일 자유한국당 의원은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다. 지역 예산 삭감과 정치 보복, 특히 문경은 박정희 대통령과 연관이 깊은 곳인데 경제 발전 등 미래를 보지 않고 자꾸 과거로 회귀한다고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직 국회의원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는 법원의 1심 판단까지 19일 나왔다. 삼성물산 합병의 적법성을 둘러싸고 1년 8개월간 이어진 법적 다툼이 삼성 측의 승리로 일단 정리된 것이다. 이러한 법원의 판단을 분석해볼 때 박 전 대통령이 삼성에 불법적 특혜를 줬다는 논리는 이제 성립되기 어려운 것 아닌가. 이제 진실이 하나씩 밝혀지면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드라이브는 큰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정치보복이라는 말을 하고 나온 것도 현재 적폐청산 정국에 대한 강한 저항이 결국 나올 것이라는 예측을 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가운데 친박·보수 성향 단체들은 10월 21일 서울에서 대규모 대(對) 정부 집회를 열었다.
# 친박 절연, 홍준표의 선택 파장은?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옥중정치를 선언했지만 큰 폭풍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근혜의 시대’는 이제 끝났으며 그와의 절연만이 보수의 살 길이라는 판단을 홍 대표는 내렸다.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탈당시키기 위한 당 차원의 작업이 본격화됐다. 자유한국당은 20일 윤리위원회를 열어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탈당을 권유했다. 당 혁신위 권고대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자진 탈당을 권유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열흘 이내에 탈당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제명 처분이 된다.
홍 대표는 미국 방문을 위해 출국하는 23일 이전에 박 전 대통령과의 절연 작업을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해왔다. 10월 13일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연장 결정이 나왔을 때 당 차원에서 강한 어조의 비판 성명이 나왔지만 홍 대표는 측근들에게 “박 전 대통령 탈당 조치를 예정대로 한다”고 확인해줬다. 박 전 대통령의 법정 발언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홍 대표의 ‘결단’이 역효과를 부를 것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반홍(反洪) 세력 규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홍 대표가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수차례 말 바꾸기를 해왔다는 점에서 홍 대표의 결정이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동이며 결국 악수가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홍 대표는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로 나섰던 지난 3월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춘향인 줄 알고 뽑았더니만 향단이었다. 그래서 국민이 분노한 것이다. 그래서 탄핵당해도 싸다”라고 하며 박 전 대통령과의 절연을 선언했다.
하지만 대선 정국이 가열되고 보수 결집 현상이 조금씩 나타나는 과정에서 그의 지지도가 올라가기 시작하자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적극적인 ‘박근혜 마케팅’을 시작한 것이다. 그의 지난 4월 발언을 보면 “정치적으로는 사체가 돼 버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다시 등 뒤에서 칼을 꽂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받은 것은 최순실이한테 옷 몇 벌밖에 없다. 무죄가 된다고 본다”고도 했다.
홍 대표는 TK를 찾아서는 글자 그대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100% 활용했다. 홍 대표는 지난 4월 TK를 찾아 “고향 여러분들, TK는 원래 화끈하지 않습니까? 고향 분들이 적어도 박근혜 전 대통령만큼은 붙여줘야 될 거 아닙니까? 대구경북에서 홍준표에게 80%만 몰아주면 홍준표가 청와대 들어갑니다”라고 했다. 이랬던 홍 대표는 대선이 끝나자 태도를 또다시 바꾼다. 그는 8월이 되자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 문제는 앞으로 우리 당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정치적 책임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 책임을 안 진다면 무책임한 정치가 된다”며 출당 방침을 다시 들고 나왔다.
이런 ‘전력’이 있기 때문인지 쾌도난마형의 홍 대표지만 박 전 대통령 출당 문제는 일사천리로 밀어붙이지 못했다. 자유한국당 혁신위조차 박 전 대통령 출당을 권고했지만 요즘도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민심을 묻고 다닌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출당 조치는 하지만 친박 핵심인 서청원·최경환 의원은 내몰지 못할 것이란 관측도 현재로서는 우세하다. 당내 반발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친박 의원들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의원총회에서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자유한국당 한 핵심당직자는 “바른정당 의원 영입을 위해 박 전 대통령을 출당시키는 것은 내부 분란만 가속화하고 큰 실효도 없다는 당내 목소리가 있다. 반홍 결집의 빌미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또 말을 바꾸는 것은 더 큰 악수를 두는 것이며 ‘친홍 체제’를 빨리 갖추기 위해서라도 박 전 대통령 정리가 필요하다고 홍 대표는 생각하는 것 같다”고 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