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6일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한 말이다. 그리고 지난 13일 ‘총수대행’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이사회 의장 등 모든 직위에서 퇴진을 선언했다. 이 부회장이 ‘훌륭한 분’을 찾은 것일까.
삼성그룹 최고경영자 인사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최순실 사태로 사실상 인사가 이뤄지지 못했다. 더군다나 올해는 이 부회장이 영어의 몸인 상황에서 이뤄지는 인사다. 좀 더 투명한 지배구조를 위한 인선이 이뤄질 것이란 관측과 함께 옥중경영 포석이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그룹의 최고경영자 인사를 앞두고 재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은 삼성서초사옥. 고성준 기자
삼성전자는 지난해 정관변경을 통해 대표이사가 맡아오던 이사회 의장을 사외이사에게도 개방했다. 이에 따라 내년 3월 삼성전자에 첫 외부 출신 이사회 의장이 탄생할 수도 있다. 이사회 의장은 주주총회 특별결의로만 해임할 수 있는 등기임원으로서 권리와 이사회 소집권을 갖는다. 현대차는 의장 유고시 임시의장 또는 이사진 내 순서에 따라 소집권을 갖지만 삼성전자는 오로지 의장만 이사회를 열 수 있다. 회사 경영을 위한 주요한 의사결정은 이사회를 거쳐야 한다. 이사회 소집권은 상당한 권한이다.
하지만 실제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이 된다고 해도 실권을 행사하기는 어렵다. 정관보다 우선하는 상법에서는 ‘소집권자인 이사가 정당한 이유 없이 이사회 소집을 거절하는 경우에는 다른 이사가 이사회를 소집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이사회 소집권을 함부로 무기로 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사외이사 추천은 이사회 권한이다. 집중투표제 등을 허용하는 상법개정안이 통과되기 전에는 현재 이사회에 우호적인 인물이 선임될 수밖에 없다. 그룹 지배구조에서 중요한 삼성생명은 이미 사외이사가 의장이지만 잡음이 없다. 삼성전자에 사외이사 의장이 등장해도 상징적 의미 이상을 두기 어렵다.
이 때문에 삼성의 이번 인사는 ‘옥중 경영’을 위한 포석으로 볼 여지가 더 크다. 삼성 사정에 정통한 재계 관계자는 “성과 평가 없이 4∼5년 넘게 연임한 전문경영인이 늘면서 이들이 총수 부재 상황에서 오히려 수혜를 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면서 “총수의 고유권한인 인사권 행사를 통해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은 법원의 1심 판결에서 외국환거래법 위반이 인정됐다. 금융회사의 지배구조에 관한 법률에서는 금융관계법령을 위반한 금융회사 최대주주의 의결권을 일정 기간 제한할 수 있다. 현재 삼성그룹을 대표하는 동일인은 이건희 회장이지만, 공정거래위원회는 조만간 실질적 총수인 이 부회장을 삼성그룹 동일인으로 지정할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경우 삼성물산이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 19%의 의결권이 제한될 수 있다. 이 부회장으로서는 자칫 흔들릴 수 있는 그룹에 대한 통제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SK의 경우 최태원 회장 수감 중에도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해 그룹경영이 이뤄졌다”면서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상황에서 이 부회장이 실형을 살 경우 뭔가 그룹을 통제할 ‘리모트컨트롤’ 장치가 필요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삼성의 한 내부 인사는 “미래전략실이 전격 해체된 지 1년도 안 됐는데, 비슷한 조직을 또 다시 만든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면서도 “하지만 업무 연관성이 큰 전자 계열사와 금융 계열사 업무를 조정하는 조직을 둘 필요성은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금융그룹 통합감독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그룹을 아우르는 조직을 만들 명분은 세울 수 있다. 최근 금융연구원이 금융위원회를 위해 작성한 금융그룹 통합감독 방안을 보면 금산결합 금융그룹의 경우 주력 비금융계열사가 그룹 경영관리를 주도함에 따라 금융계열사간 위험관리 및 내부통제 등을 위한 의사결정∙전달 및 협조체계가 미비하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법에 의해 그룹의 대표회사를 지정하고 금융그룹 감독을 위한 일정한 책임과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성의 경우 간판 회사인 삼성전자가 대표회사로 지정돼 사실상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을 명분이 생기는 셈이다.
미래전략실 해체로 안식년에 들어갔던 전략1팀 소속의 김용관 삼성전자 부사장이 최근 업무에 복귀했다. 정현호 전 미전실 인사팀장(사장)도 사장단 인사에 맞춰 삼성전자에서 중책을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사장은 미전실에서 재무·감사·인사 업무를 두루 담당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각 사 이사회가 아닌 그룹 차원의 인사라는 게 총수 경영의 상징”이라면서 “지배구조 개선보다 옥중 통제권 강화를 위한 인사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지난 19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6부(함종식 부장판사)는 삼성물산의 옛 주주였던 일성신약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낸 합병무효 소송에서 일성신약의 청구를 기각해 원고 패소 판결했다.
종합하면 승계 자체가 불법이 아니고, 합병비율은 현행법 기준을 충족했다는 내용이다. 삼성물산 측이 인위적으로 주가를 떨어뜨리려 했다는 시세조종 혐의도 인정하지 않았고,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과정 위법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번 소송 결과가 1심 유죄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앞서 서울고등법원이 주식매입청구 가격이 너무 낮다는 일성신약 측의 조정신청을 받아들인 것과 배치된다. 당시 고법은 삼성물산이 오너 일가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 실적 부진을 겪고, 국민연금도 주가 형성을 도운 정황이 있다며 1주당 적정가를 6만 6602원으로 정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상급법원과 하급법원의 판결이 다른 것이다. 그 어떤 소송 결과도 예단이 어려운 셈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