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구는 이제 KBO 리그에 특별한 문화로 정착됐다. 중요한 게임은 물론 정규시즌 경기에서도 필수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매년 화제의 시구자들이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오르내리고, 모두가 더 기발한 방법으로 시구를 하기 위해 온갖 아이디어를 짜낸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시리즈 시구는 ‘아무나 할 수 없는’ 영광으로 꼽힌다. 정규시즌과 와일드카드 결정전,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는 홈팀이 시구자를 섭외한다. 반면 한국시리즈는 특정 구단이 아닌 KBO가 직접 선정한다.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그 시기에 가장 화제가 된 인물, 혹은 야구를 포함한 각 분야에서 상징성을 띠는 인사를 섭외하기 위해 공을 들인다.
이 때문에 역대 한국시리즈 시구자 명단을 보면 세상의 변화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정치인과 연예인을 거쳐 남다른 사연을 지닌 이웃까지, 한국시리즈 시구자들의 면면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달라져왔다.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2016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2차전 시구에 나선 ‘골프 여제’ 박인비. 연합뉴스
# 정치인 일색이었던 초창기
프로야구 초창기는 시구 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이전이다. 한 시즌에 한두 경기에서만 시구 이벤트를 마련했다. 1982년 원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4차전, 1983년에는 1차전만 각각 시구를 했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는 아예 한국시리즈 시구가 없었다. 1988년과 1989년 역시 각각 6차전과 5차전에서 한 차례씩만 시구자가 나왔고, 1990년과 1991년 역시 1차전만 시구자를 섭외했다.
역대 최초로 한국시리즈 시구를 맡은 인물은 유흥수 충남도지사였다. 당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OB(두산의 전신)의 연고지역이 대전이었던 터라 유 도지사가 역사적인 첫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자로 나섰다. 4차전 시구자는 한국 야구에 관심이 많았던 피터 오말리 당시 LA 다저스 구단주였다. 오말리 구단주는 1989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도 그해 유일한 한국시리즈 시구를 맡았다. 훗날 ‘코리안 특급’ 박찬호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사실 초창기 시구는 주로 정치인들의 몫이었다. 특히 개막전이나 한국시리즈 같은 상징적 경기 때는 시구를 맡으려는 정치인들이 줄을 섰다. 한 원로 야구인은 “당시에는 시구라는 이벤트 자체가 개막전이나 올스타전, 포스트시즌처럼 특별한 경기 때만 마련되는 행사였다. 주인공들도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다”며 “사실상 정치인들의 보여주기 식, 혹은 과시용 이벤트로 많이 활용됐다. 초창기에는 지역 단체장들이 한 번씩 거쳐 가는 관례처럼 여겨졌다”고 회상했다.
한국시리즈에 올라간 구단의 연고지역 당시 단체장들은 귀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87년 삼성과 KIA의 대결에선 1차전에서 박오근 대구시장, 3차전에서 김양배 광주시장이 각각 첫 공을 던졌다. 또 1991년 1차전은 이효계 광주시장, 1992년 1차전은 김주봉 대전시장, 1993년 1차전은 강영기 광주시장의 몫이었다. 이후에도 ‘시장님’들의 시구는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초창기 시구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미스코리아’들의 참여다. 당시에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지상파 TV를 통해 생중계됐고, 미스코리아들은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와 관심을 누렸다.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선발된 김성령이 그해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시구하면서 처음으로 야구나 정치와 관계없는 인물이 시구를 맡는 장을 열었다. 또 1990년 1차전에서는 그해 미스 태평양으로 뽑힌 이승은이 시구를 맡았다.
1995년 고 김영삼 대통령이 잠실야구장에서 한국시리즈 개막전 시구하는 모습. 연합뉴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시리즈에서 시구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2년 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에서 시구한 뒤 12년간 대통령의 프로야구 시구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일단 일정을 맞추기가 어렵고, 시구가 결정된 후에도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다. 무엇보다 완벽한 보안이 최우선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대통령의 시구 계획이 미리 알려지는 순간 일정은 전면 취소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극비에 부친다”고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도 야구를 향한 사랑이 남달랐다. 야구 명문인 경남고 출신이라 더 그랬다. 국회의원 시절 친선 야구경기에 출전하기도 했고, 정규시즌에 한 차례 야구장을 방문해 OB와 태평양의 경기를 관람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LG와 태평양이 맞붙은 한국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당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깜짝 시구자로 등장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어 1995년 잠실구장에서 열린 정규시즌 개막전(삼성-LG전)에서도 시구를 했고, 1995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도 2년 연속 다시 시구자로 나섰다. 홀로 세 번이나 마운드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이후 18년간 대통령의 한국시리즈 시구는 이뤄지지 않았다. 포스트시즌 이외의 다른 경기에서도 2003년 올스타전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시구한 게 전부다. 그러나 201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다시 박근혜 전 대통령이 마운드에 올라 깜짝 시구를 했다. 당연히 경기 직전까지 철저히 보안이 유지됐고, 취소가 불가피할 경우를 대비해 4차전 시구 예정자가 미리 잠실구장에 와서 대기하고 있을 만큼 007 작전이 펼쳐졌다.
# 연예인 시구 전성시대
한국시리즈 전 경기에 시구자를 섭외하게 된 건 1996년부터다. 1993년 2경기(1·5차전), 1994년 1경기(1차전), 1995년 2경기(1·3차전)로 드문드문 이어지던 시구는 1996년 들어 본격적으로 활성화됐다. 1차전부터 6차전까지 모두 시구 이벤트가 열렸고, 시구자 면면도 다양했다. 송언종 광주시장-체조 선수 여홍철-최기선 인천시장-마라톤 선수 황영조-배우 이승연-홍재형 KBO 총재 순으로 시구를 했다. 애틀랜타 올림픽이 열린 해라 아마 종목 대표 선수들이 두 명 포함됐다.
2004년 수원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시구하는 박정아. 연합뉴스
2003년에는 최초로 연예인 세 명이 7경기 가운데 3경기 시구를 맡았다. 이효리(2차전), 하지원(6차전), 박정아(7차전)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한국시리즈가 9차전까지 이어지면서 1차전 박정아, 3차전 성유리, 5차전 손태영, 6차전 보아, 9차전 한고은까지 역대 가장 많은 연예인 5명이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특히 박정아는 2003년 7차전에 이어 2004년 1차전 시구를 연이어 맡으면서 역대 유일한 2경기 연속 시구자로 기록됐다. 2004년 1차전을 앞두고 벌어진 해프닝이 원인이었다. 사실 2004년 1차전 시구는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맡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1차전 직전 이 총리에게 긴급 상황이 생겼다. 헌법재판소가 신 행정수도 건설 특별법 위헌 결정을 내리면서 이 총리가 대책회의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불참을 통보했다. KBO가 부랴부랴 대체 시구자를 물색하다 직전 시구자 측과 연락이 닿았고, 그렇게 박정아가 다시 마운드에 섰다.
이후에도 연예인 시구는 매년 빠지지 않고 이어졌다. 한혜진(2005년), 김아중(2006년), 선예 박진희 손담비(2007년), 장미희 홍수아(2008년)를 거쳐 2009년에는 1차전부터 7차전까지 모두 연예인 시구자(박시연-채연-공효진-김남주-최강희-장동건-이보영)가 릴레이를 펼쳤다. 이후에도 박민영, 박한별, 구혜선, 김하늘, 윤세아, 션-정혜영 부부, 시크릿, 이동욱, 김준호, 손예진 등이 시구했다. 남성에 비해 여성 연예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많다.
# 연예인 시구 아닌 ‘스토리 텔링’ 시대
2013년 7차전 배우 손예진의 시구를 마지막으로 시구의 트렌드도 바뀌기 시작했다. 점차 흥미 위주의 이벤트를 지양하고 “시구에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담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에도 종종 비 연예인이나 비 정치인이 한국시리즈 시구자로 나섰다. 1999년에는 2차전 시구자로 롯데 외국인 투수 에밀리아노 기론의 아내인 셰린 기론이 나와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2000년 5차전에선 장애인 올림픽 사격 2관왕에 오른 김임연이 시구를 맡아 감동을 안겼다. 2001년 6차전에선 프로야구 개막일(1982년 3월 27일) 출생자인 일반인 유연희 씨와 김인재 씨가 시구 행사를 함께했다. 이외에도 서울대 야구부 주장인 용민 씨(2003년 3차전), 선로에서 아이들을 구하다 두 발목을 잃은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씨(2004년 8차전), 대한민국 최초 우주인인 이소연 씨(2008년 3차전), 한국 최초의 야구장 여성 장내 아나운서인 모연희 씨(2013년 4차전) 등이 감동의 시구를 했다.
2016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입양에 대한 인식 개선에 앞장 선 김덕근 조영선 부부가 시구를 했다. 연합뉴스
그러나 2014년부터는 아예 연예인이 아닌 상징적 인물들로 한국시리즈 시구를 채우기 시작했다. 여성 스포츠지도자인 홍양자 이화여대 교수, 시각장애인 허경호 씨, 소방관 김남진 씨, 난치병 어린이 박주상 군, 야구 원로 어우홍 전 롯데 감독, 새 구단 kt의 마스코트인 ‘빅’과 ‘또리’가 차례로 시구했다. 2015년에도 안중근 의사 증손자인 안도용 씨와 지하철 선로에서 시각장애인을 구출한 ‘용감한 시민’ 김규성 씨를 비롯해 예비역 대령, 환경미화원 등 다양한 직업군이 시구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시리즈가 4경기로 끝난 지난해에도 모범 장병으로 뽑힌 박주원 육군 2사단 상병, 골프선수 박인비, 다섯 아이를 입양한 김덕근-조영선 부부, 탈북 청소년 야구단인 퍼플야구단 소속 염용혁 군이 시구했다. 최근 3년간 연예인 시구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초딩’ 김사율 꿈을 향해 던지는 행운…야구인들의 시구 시구는 ‘투수’가 아닌 인물이 유일하게 프로 마운드에서 공을 던질 수 있는 기회다. 한국시리즈 시구라면 더 그렇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한국시리즈 시구 기회를 얻었던 프로야구 선수가 있다. kt 김사율이다. 프로 유니폼을 입기 전이다. 김사율은 감천초등학교 6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2년 사직구장에서 롯데와 한화의 한국시리즈 3차전 시구자로 나섰다. 롯데가 원정에서 한화에 먼저 2승을 올리고 홈에서 첫 경기를 시작하던 날이라 사직구장의 응원 열기가 엄청났다. 부산에서 나고 자라 롯데에 입단하는 게 꿈이었던 김사율에게는 당연히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감천초등학교는 그해 롯데 자이언츠기 초등학교 야구대회 우승팀이었다. 팀 에이스였던 김사율은 대회가 끝날 무렵 감독으로부터 “이번에 열심히 하면 진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귀띔을 들었다. 그 ‘진짜 좋은 일’이 바로 한국시리즈 시구였다. 보통 일반인이나 어린이들은 시구를 할 때 마운드보다 몇 발짝 앞으로 걸어 나가 공을 던진다. 실제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 거리인 18.44m가 그들이 공을 던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사율은 ‘사직구장 마운드’에서 던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밤낮으로 장거리 시구를 연습했다. 그리고 결국 포수 미트에 꽂히는 멋진 시구를 완성했다. 사직구장 관중들은 “저 꼬마 대단하다”고 탄성을 내뱉었고, 감천초등학교는 전교생이 수업을 중단한 채 교실에서 TV로 김사율의 시구를 지켜봤다. 이후 김사율은 1999년 롯데 지명을 받고 입단하면서 ‘훗날 롯데 선수가 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롯데의 포스트시즌 경기에도 출전해 맹활약했다. 그야말로 꿈이 현실이 된 순간이다. 2011년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1차전 시구에 나선 고 장효조 선수의 아들 장의태 씨. 연합뉴스 김사율이 어린 시절 뜻밖의 행운을 누린 인물이라면, 박찬호와 선동열은 그 이름의 상징성 덕분에 한국시리즈 시구자로 선택됐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인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다저스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1998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시구를 했다. 한국 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로 꼽히는 선동열 국가대표팀 감독도 1999시즌을 끝으로 일본 주니치에서 은퇴한 뒤 2000년 한국시리즈 7차전 시구를 맡았다. 아쉽게 불발된 시구도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또 다른 신화를 쓴 텍사스 추신수는 클리블랜드 소속이던 2012년 문학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3차전 시구자로 물망에 올랐다. 섭외가 잘 진행돼 성사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홈팀인 SK가 추신수에게 SK 유니폼을 입어달라고 요청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시구자가 홈팀 유니폼을 입는 게 관례인 데다, SK는 2007년 해외파 특별지명에서 추신수를 지명한 팀이다. 추신수가 한국에서 뛰게 된다면 SK에 입단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유니폼을 입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반면 클리블랜드 선수인 추신수는 리그가 다르더라도 다른 구단 유니폼을 입고 공을 던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추신수 측에서 “그럼 사복이 아닌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던지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번엔 SK 측에서 난색을 표했다. 결국 없던 일이 됐다. 그런가 하면 2011년 한국시리즈 1차전은 야구인 가족의 시구로 장내를 숙연하게 했다. 삼성의 레전드이자 전설적 타격왕인 고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의 아들 장의태 씨가 시구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장 전 감독은 그해 9월 암으로 사망했다. 장 씨는 아버지가 누볐던 대구구장에서 담담하게 공을 던졌고, 삼성 선수단과 홈 관중은 묵념으로 추모의 뜻을 표현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