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오전 서울지방변호사회 광화문 조영래홀에서 ‘남배우 A 성폭력 사건 항소심 유죄판결 환영 기자회견’이 열렸다. 당초 지난 13일 항소심 판결이 내려진 직후 예정됐던 회견이었다.
그러나 ‘남배우 A’, 즉 배우 조덕제가 직접 기자들과 만나 얼굴과 실명을 공개하고 인터뷰를 하면서 피해 여배우 측도 이에 대한 새로운 반박을 추가하거나 기자회견에 배우가 직접 참석할 가능성 등이 제기돼 왔다. 다만 이날 회견에 피해 여배우는 참석하지 않았으며 조덕제에 대한 실명 언급도 하지 않고 ‘A’ 씨로 통칭했다.
24일 서울 광화문 변호사회관빌딩 조영래홀에서 열린 ‘남배우A 성폭력 사건’ 항소심 유죄 판결 환영 기자회견에서 한국여성민우회 측은 ‘같음을 인정받고 다름이 이해되다’라는 제목으로 쓴 4장 가까운 피해자 여배우의 편지를 대독했다. 임준선 기자
피해 여배우의 변호를 맡고 있는 조인섭 법무법인 신세계로 변호사는 “2심은 영화 촬영장 내에서 감독의 일방적인 연기 지시나 A 씨의 연기 내용에 관해 피해자와 사전 공유를 하지 않고, 승낙도 받지 않은 이상 이 행위가 정당한 연기 행위거나 추행의 고의가 부정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라고 정리했다.
특히 이번 2심에서는 ‘남배우 A 씨’가 피해 여배우를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한 건에 대해 무고죄도 인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조인섭 변호사는 “(A 씨는) 감독의 지시 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하나 2심에서 감독이 연기자에게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고, 문제의 촬영은 얼굴 위주로 이어진 것이므로 그 행위가 감독의 연기 지시에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볼 수 없어 이에 대한 피해자의 (성추행)신고가 무고나 명예훼손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연대 발언의 첫 포문을 연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운영위원은 “문제의 영화는 15세 관람가의 멜로·로맨스 영화로, 피해자가 맡은 역할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이라며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13번 씬에서 중요하게 표현되는 부분은 성적인 노출이 아니라 가정폭력에 시달려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는 인물의 모습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촬영콘티에서 상반신과 인물의 얼굴 위주로 촬영하기로 돼 있었다. 멍 분장도 (여배우의)어깨와 등 윗부분에만 돼 있었고, 여벌의 의상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라고 지적했다.
만일 미리 예정돼 있던 대로 연기하지 않거나 촬영 도중에 의상이 찢어져 NG가 난다면 촬영을 진행하기 힘들어질 수 있음에도 A 씨가 카메라 앵글 바깥에 위치하는 하반신을 만졌다는 것. 이런 점을 종합하면 사건이 발생할 당시 피해 여배우 측과 가해 배우 측의 합의가 되지 않았던 상황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조인섭 변호사와 영화계 단체와 시민단체 대표자들이 24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변호사회관에서 ‘남배우A 성폭력 사건’ 항소심 유죄 판결 환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유죄가 인정이 되긴 했지만 양형 판단에 대해서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왔다.
김미순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는 “항소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연기나 촬영 중에도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은 충분히 보호돼야 한다’고 적시했다”라며 “다만 양형의 판단에 아쉬운 지점이 있다. 피고인에 대해 ‘연기자로서 감독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 순간적·우발적으로 흥분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감형했는데 이는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했다.
이어 “본 사건의 피고인은 오랜 경력의 연기 전문가다. 순간적·우발적으로 흥분상태가 되더라도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제어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 볼 때 이런 사유는 양형상 감형의 요소에서 배제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재판 과정에서 영화 촬영 스태프들의 증언에 대한 발언도 언급됐다. 안병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당시 연락이 닿았던 스태프들은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했고, 가해자의 억울한 측면을 주요하게 이야기했다”라며 “‘영화를 찍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추행을 하냐’고 말하기도 했다. 영화를 찍는다는 게 사실을 가장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 같은 행위가 ‘사실’일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임준선 기자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연예인인권지원센터 소장은 연대발언문을 통해 “1심 관련 기사는 채 30건도 되지 않았는데 현재 포털에서는 가해자의 인터뷰와 관련된 기사가 500건이 훌쩍 넘는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가해자의 인성이 좋다, 가해자는 성가대 활동을 했다, 욕도 못한다 등 사건과 관계없는 가해자의 인성을 운운하면서 그의 무죄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라며 “가해자의 거짓된 입장만을 대변하는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선정적인 소설 같은 보도는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도 비판했다.
피해 여배우는 결국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대신 직접 작성한 편지를 공동대책위 관계자가 대독했다.
여배우는 편지로 “남배우 A씨 측이 신상 공개 후 유포하고 있는 일방적인 주장은 이미 24페이지에 달하는 항소심 판결문에 따라 모두 유죄로 드러난 것”이라며 “이와 더불어 최근 저를 둘러싼 자극적인 의혹은 허위사실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이에 대해 허위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으로 고소가 진행 중이다”라고 먼저 밝혔다.
이어 “저는 15년 경력 연기자이고, 연기와 실제를 파악할 수 있는 전문가”라며 “연기 경력 20년 이상인 A 씨는 상대 배우인 제 동의나 합의 없이 폭력을 휘두르고 저를 추행했다. 이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가 연기를 빙자한 추행으로 판단한 것이며 이런 행위가 영화계 관행이라는 이유로 옹호돼서는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무고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A 씨를) 무고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당시 제가 누리던 평탄하고 만족스러운 일상과 안정적인 배우 생활을 모두 잃을 수 있는 불안 속에서 단지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A 씨를 고소했겠나”라고 해명했다.
이어 “1심 재판에서 증언한 이후 A 씨 측이 나에 대해 허위 과장의 증언 습벽이 있는 사람처럼 몰아가기도 했다”라고 언급하며 “A 씨 측의 지인이 1심 공판기간 중 단기간 취업한 언론사에서 낸 허위기사들이 공판 과정에서 제가 ‘어떤 여성인지’ 보여주는 자료로 활용됐다”라고 지적했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에서 ‘피해와 관련된 사실관계 파악에 집중하겠다’고 함에 따라 피해자인 자신이 ‘어떤 여성’인지가 아닌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이번 유죄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남배우 A’ 사건은 2015년 4월 저예산 영화를 찍던 도중 남편 역할의 배우 조덕제가 상대 여배우에 대한 가정폭력 장면의 연기를 하면서 합의되지 않은 신체 접촉으로 상해를 입힌 사건이다. 피해 여배우는 전치 2주의 상해를 입고 조덕제를 강제추행치상으로 고소했으며, 조덕제 측은 그를 명예훼손과 무고 혐의로 맞고소했다.
지난해 1심에서 재판부는 ‘배역에 몰입한 연기’와 ‘업무상 행위’를 인정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감독의 지시가 아닌 행위가 이뤄졌으며 순간적·우발적으로 흥분해서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추행의 고의가 부정되지 않는다”고 판단, 조덕제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고 4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했다.
이에 조덕제가 지난 16일 처음으로 실명과 얼굴을 공개해 인터뷰에 나서 피해 여배우 측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으며, 양 측이 모두 대법원에 상고해 현재 재판 일정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조덕제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앞선 인터뷰에서 제가 밝힌 것은 모두 사실”이라며 “대법원 재판을 위해 현재 자료를 수집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진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을 아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