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동안 감쪽같이 신분을 위장한 채 지내오던 그가 경찰에 체포된 것은 지난 8월 2일이었다. 자신의 딸을 유괴한 지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이혼 후 딸의 양육권을 박탈당한 그가 딸을 납치해서 볼티모어로 도망가서는 그곳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행여 다른 사람의 눈에 띌까 딸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장을 시켰으며, 자신의 이름도 수십 년 동안 사용하던 ‘클라크 록펠러’에서 다시 ‘칩 스미스’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딸을 찾는다는 내용의 TV 방송과 신문을 본 한 제보자의 증언으로 결국 그는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동시에 30년 가까이 지속된 기막힌 사기극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그의 수상한 정체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러났다. 체포 당시 그는 자신을 ‘클라크 록펠러’라고 주장했지만 지난 30년 동안 그는 미 전역을 돌면서 이름, 직업, 학력, 출생신분까지 속이고 다녀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페인트공 아버지와 재봉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지난 1978년 17세 되던 해 교환학생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듬해 그는 ‘크리스티안 라이터’로 이름을 바꾼 후 코네티컷주의 한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며, 사비오 가족의 집에서 하숙을 시작했다.
하지만 1981년 1월 평소 무례한 언동으로 사비오 가족의 심기를 건드렸던 그는 결국 하숙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길로 곧바로 위스콘신주로 이사를 간 그는 그곳에서 만난 미국인 여성 에미 저실드와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린카드’를 취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는 결혼한 지 하루 만에 도망을 갔고, 그 후 ‘크리스티안 게르하르츠라이터’는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부 지역인 캘리포니아주 산 마리노에서였다. 1982년 크리스토퍼 치케스터라는 이름의 점잖은 체하는 ‘영국 귀족 가문의 후손’이 부유한 동네인 산 마리노에 나타났다. 당시 그를 알고 지냈다고 말하는 한 사람은 “그는 자신을 영화학교에 다니는 유학생이라고 소개했다”고 말하면서 그가 건네는 명함에는 자랑스럽게 ‘마운트배튼 경의 13대 후손’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발음도 영국식이었으며, 늘 고급스런 옷을 입고 다녔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수상한 점도 있었다. 한 이웃 주민은 “그는 뚜렷한 수입이 없는 것 같았는데도 늘 부자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아무래도 허풍쟁이었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무렵 그는 독일에 있는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전화를 한 후 연락을 끊었다. 당시 통화에서 그는 “독일 이름이 너무 길고 발음하기 어려워 ‘치케스터’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던 중 심각한 문제가 터졌다. 1985년 그가 세들어 살고 있던 집주인인 존과 린다 소후스 부부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것이다. 당시 신혼여행을 다녀오겠노라고 말하고 떠난 소후스 부부는 그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치케스터 역시 두 달 후 산 마리노에서 자취를 감췄다.
▲ 게르하르츠라이터의 전처 산드라 보스와 딸. | ||
그리고 1987년, 이번에는 ‘크리스토퍼 크로’라는 이름의 주식중개인이 월스트리트에 등장했다. 코네티컷 그린위치의 부유층이 속해 있는 요트클럽에 가입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을 전 TV 프로듀서 겸 할리우드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자신이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했으며,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제작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요트클럽에서 알게 된 지인의 도움으로 그는 월스트리트의 ‘펠프스’사에 주식중개인으로 취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사기 행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주식중개인 증명서에 유명 연쇄살인범인 데이비드 벌코위츠의 사회보장번호를 기재하다 적발돼 해고당했던 것이다.
그후 ‘니코’ 경호회사와 ‘키더 피보디’ 경호회사를 옮겨 다니며 일했던 그는 1988년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사라졌다. 동료들에게는 “부모님이 남미로 납치를 당하셨다. 몸값을 지불하러 떠나야 한다”는 황당한 말을 남겼다.
다음 날 ‘크리스토퍼 크로’를 찾는 경찰들이 회사로 찾아왔다. 이유인즉슨 며칠 전 한 중고차 회사에 크리스토퍼 크로라는 남성이 존 소후스 소유의 픽업 트럭을 팔려고 전화를 걸어왔다는 제보가 접수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을 미리 감지한 크로는 이미 숨어 버린 후였다.
그가 ‘클라크 록펠러’로 자신을 위장한 것은 지난 1993년부터였다. 뉴욕으로 무대를 옮긴 그는 17세에 예일대를 졸업한 천재 물리학자이자 한때 정부의 우주개발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실력자로 둔갑해 있었다. 그는 보스턴과 뉴욕의 상류사회에서 록펠러 가문의 일원이라고 떠벌리고 다녔으며, 한번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를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했다고도 말했다.
1994년 하버드 대학 출신의 산드라 보스를 만나 1년간의 구애 끝에 결혼에 성공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속인 채 딸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지냈다. 하지만 이내 남편이 록펠러 가문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그는 100만 달러(약 10억 원)의 위자료를 받고 양육권을 포기해야 했다.
현재 그의 변호인은 그가 1993년 이전, 즉 록펠러로서 살기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린 시절 독일에서 자란 일도, 월스트리트에서 주식중개인으로 일한 것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기행각은 여러 사람의 증언과 정황을 바탕으로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독일에 있는 가족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가 수십 년 전 집을 나갔던 바로 그 ‘크리스티안 게르하르츠라이터’가 맞다고 확인했으며 지문 확인 결과도 이 사실을 입증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